쇼팽의 사랑과 음악과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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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데릭 프란시스섹 쇼팽 (1810.2.22 ~ 1849.10.17)
쇼팽의 가정환경을 보면 아버지를 제외하고 모두 여성들이다. 프레데릭의 성격 형성기에 이것은 강하게 작용하여 그가 여성적 성격을 갖는데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성격은 프레데릭의 평생의 친구, 남성적인 성격이 강한'티투스'에게 동성애적인 애정을 보이는가 하면 남성같이 강하고 적극적이며 모성본능을 가진 죠르쥬상드와의 관계에서도 특이한 애정생활을 보여준다.
쇼팽가의 자매들은 모두 건강하였는데 유난히 프레데릭의 몸은 늘 집안 식구들의 걱정거리였다. 유년시절 프레데릭은 어머니가 치고 있는 피아노 밑에 기어 들어가 피아노에서 울려 나오는 음을 듣고 기뻐하였다. 조금 더 커서는 피아노 건반을 만지며 노느라 혼을 뺏기며 시간을 보내곤 하였다. 7세부터 지브니 선생님과 피아노 공부를 하게 되었는데, 쇼팽이 즉흥 연주를 시작하면 지브니 선생님과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지브니와 다른 사람들의 입을 통해 이름을 알려져 쇼팽은 상류사회에 드나들게 되었다.
학창시절 쇼팽은 학창시절 곧잘 만화를 잘 그려 그의 장기였다. 그리고 문학이나 역사에는 몰두했지만 자연과학이나 그리스어 라틴어는 지루해하여 만화만 그렸다고 한다. Pichon은 쇼팽의 별명이었다.(Chopin을 바꾸면 pichon 이 됨). 그러나 쇼팽은 우수한 성적을 기록하는 학생이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바르샤바 음악원에 입학하여 엘스너 선생을 만나게 된다. 엘스너는 3년간 쇼팽을 밑에 두고 가르쳤다. 그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쇼팽을 <프레데릭 쇼팽 -유능한 학생>, <쇼팽-뛰어난 학생, 2학년 때 건강이 나빠 휴양 여행을 함.>< 쇼팽- 3학년 학생, 위대한 음악적 능력자, 음악의 천재>
이후에 쇼팽은 독일로 여행을 간다. 그는 베를린 여인들에 대해 (그녀들은 아름답다. 그러나 인형들을(그녀들) 위해 잘려나가는 옷감들이 가여워 죽을 지경이다. 풍자를 대담하게 하거나, 야유하는 쇼팽의 모습은 특히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이런 사실은 쇼팽의 특징적인 성격의 일면으로서 자라면서 점점 짙어지는 경향이다. 독일에서 쇼팽의 연주를 들은 귀족들은 <내가 살아있는 평생에 쇼팽이라는 이름을 잊지 않겠습니다.> 라고 하기도 했다.
1829년 니콜라스 1세가 대관식을 거행하기 위해 바르샤바에 왔을 무렵에 파가니니도 도착했다. 쇼팽은 그의 악마적인 영광을 안고 있는 파가니니의 연주를 듣고 충격을 받은 일이 있다. 이 무렵 그의 < 에튀드>가 탄생하였다. 이후 음악의 도시 비엔나에 여행을 가서 연주회를 가졌는데 연주회는 대성공이었으나, 쇼팽은 " 피아노 앞에서 새파랗게 질려 죽을 힘을 다해 연주 했다."라고했다.
전문적인 비평가들 중에는 쇼팽의 연주가 너무 섬세하고 나약하다는 평을 한 이들도 있다. 이에 대해 쇼팽은 "문자 그대로 피아노를 두들겨 부수는 것 같은 이곳 음악가들의 연주만들어온 사람들에겐 나의 연주가 너무 가냘프고 힘없게 생각하는 청중도 있던 것 같다. 쇼팽은 귀족들의 잦은 파티에서 연주 요청을 자주 받았다. 숙녀들이 준 테마로 즉흥 연주를 했다. <숙녀들의 놀라운 속삭임들은 끊이질 않았다.
첫사랑의 초상들 쇼팽의친구들은 그가 브라이카라는 여성을 사모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나에겐 이상의 여인이 있어. 나는 그녀와 한번도 이야기를 나눈 적이 없지만, 반년간이나 무언중에 그녀를 충실히 사모해 왔어. 나는 밤마다 그녀를 꿈꾸고 있어. 그녀를 위해 왈츠 70. no.3을 만들었어... " 이것은 쇼팽의 소극적이고도 여성스런 성격을 잘 보여준다. 이여인은 바르샤바 오페라 가수 '콘스탄티아 글라드코프스카' 였다. 그녀 또한 음악원에 있었으므로 만날 기회가 잦았다. 이 여인에 대한 쇼팽의 사랑은 어디까지나 한 번 고백도 못한 채 쇼팽만의 환상으로 끝나게 된다. 이 모든 그의 고백은 친구 '티투스'에게만 털어놓았다.
1830 연대 초 쇼팽은 (20 세) 바르샤바에서 가장 사랑 받는 인물이 되어 있었다. 이 무렵 상류 사회의 집을 집 처럼 드나들었다. 1830년 3월 17일 쇼팽은 바르샤바 국립극장에서 제 1 회의 콘서트를 열게 되었는데 입장권은 연주회 3일 전에 모두 매진 되었다. 연주회를 앞두고 쇼팽은 간절히 원하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콘스탄니아가 와서 들어주기를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연주회는 대성공 이었으나 쇼팽은 그리 기쁘지 않았다.
프리마돈나 '콘스탄티아'가 쇼팽을 매료시킨 것은 사실 뛰어난 용모 때문이었던 같다. 쇼팽이 그녀를 (이상의 여성)으로 생각했던 것은 실제의 그녀가 아니라 그의 마음에 비친 어느 순간의 그녀가 고정된 이상형으로 박혔기 때문이다. 그의 음악적 성장을 위해 파리로 갈 결심을 했으나 자꾸만 늦추었던 이유도 콘스탄티아에게 열중한 사랑의 마음 때문이었다.
떠나는 주일이 되자 그의 울적함은 더욱 깊어져 갔다. 사랑하는 코스탄티아를 두고 떠나야 한다는 생각은 그를 더할 수 없는 고통을 주었다. 출발하기 전날 쇼팽은 그녀에게 반지를 선물로 주었고 그녀는 리본을 주었다. 쇼팽은 아무런 약속의 말도 못하고 헤어졌다. 첫사랑 콘스티아가 쇼팽을 사랑했느냐는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적어도 쇼팽에게 사랑했던 여인이었음이 더 중요한 문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녀 땜에 음악의 길을 포기할 정도는 아니였던 듯 하다.
여기서 잠깐 쇼팽의 어머니로부터 첫사랑 콘스탄티아 ,포토츠카, 마리아, 조르쥬 상드에 이르기 까지 그와 관계를 맺었던 여인들은 그의 음악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
고국을 떠나 비엔나에서 티투스와 함께 파리로 가는 도중 드레스덴이라는 곳에서 '포토츠카'라는 매혹적인 부인을 만나게 된다. 쇼팽과 후에 연인관계를 맺게 된다. 비엔나에 도착한 후 전에 성공했던 기억을 되살리며 쇼팽은 희망을 가졌으나 고국 바르샤바가 혁병이 일어남으로써 젊은 남성들은 조국을 위해 싸우기 위해 고국으로 갔으나 (친구 '티투스'도..- 쇼팽의 최고의 의지할 기둥) 쇼팽의 아버지는 쇼팽을 오지 못하도록 했다.
1. 쇼팽의 몸은 도저히 병정으로서 감당을 못한다는 점 2. 조국에 대한 봉사는 총을 잡는 것만이 아니라 예술로 가능하다는 것 3. 쇼팽을 외국으로 보낸 것은 비운의 조국을 지키게 하기 위한 것 티투스와의 이별은 그에게 너무도 큰 충격이어서 우울한 비엔나의 생활이 시작된다.
비엔나의 유명한 음악가들은 쇼팽의 재능에 외면적으로는 우정을 보였지만 속으로는 위험한 경쟁상대로 의식하여 은근히 못마땅해 하였다. 불쌍하고 가엾은 쇼팽...그는 이내 용기를 잃었다. 그의 소심한 성격 탓에 더욱 실패감을 느꼈다.
그의 고국 친구'맛신스키'에게 이즈음 보낸 편지에는 "바르샤바에서 내게 그렇게 힘을 주었던 사람에게 찾아가 의견을 물어 그걸 나에게 적어 보내줘. 나는 그에 따라 내 행동을 결정 할꺼야.." 여기에서 그 사람이란 쇼팽의 사랑' 콘스탄티아'이다. 그는 세삼스레 사무치는 여인의 마음은 알고 싶어했던 것이다. 그 당시의 고통에서 벗어나 매달릴 수 있는 정신적인 대상은 사랑하는 사람 이라는 심정이었다. 쇼팽의 격정은 날이 갈수록 더했다. 쇼팽의 다른 편지에는 "파리에 갈 것인가 고국으로 돌아갈 것인가. 삶이나 죽음이나 내겐 다 같은 것이야 만일 콘스탄티아가 내 생활을 친절히 묻거든 그렇게 염려할 것 없다고 말해줘, 내가 그녀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어서 외로워 하고 불행해 한다고 전해줘. 내가 죽고난 뒤에 내 뼈 가루는 그녀의 발 아래로 떨어져야 한다고 전해줘..." 그러면서도 쇼팽은 콘스탄티아에겐 직접 말할 용기를 내지 못했다. "나도 그녀에게 편지를 쓰고 싶어. 정말 나는 오래 전부터 내 괴로움을 풀어 보려고 애쓰고 있어. "
이즈음 빈에서는 모차르트'베토벤'슈베르트'들이 아닌 평범한 음악가들만이 횡행했다. 이때에는 왈츠가 대성행을 하고 있었다. 쇼팽은 빈에서는 왈츠곡 (그의 왈츠곡은 춤을 위한 곡이 아니다. 들어보라..) 몇 개와 마주르카를 썼을 뿐 별로 작곡의 성과는 없었다. 한편 '코스탄티아'와의 유일한 연결통로였던 맛신스키도 군에 갇다하여 그의 초조감은 날로 더하였다. <스케르초 D단조> (작품 20) 은 이런 감정을 표현한 작품이다. 1831년 7월 20일 빈을 떠남.... 빈을 떠나 뮌헨을 거치며 그는 그의 통렬한 슬픔의 외침은 'C 단조 에튀드, D 단조 프렐류드에 잘 나타나 있다. 무력감은 A단조 프렐류드에서 나타나고 있다.
파리에서 쇼팽은 1831년 파리에 도착했다. 그때 파리의 사정은 고전주의에 대한 반항이 일어나고 있었다. 셰익스피어가 높이 평가되고 베를리오즈, 롯시니 등의 유럽 각국의 유명한 예술가가 다 모여 파리는 이때 부터 예술의 도시로 변하였다. 그는 거기에서 '칼크브렌너라는 일류 피아니스트인데 그는 쇼팽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면서 조건이 있는데 그것은 3년간 제자가 되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쇼팽의 스승인 엘스너에 대한 다른 음악가들의 질투였다. 대단한 제자를 두는 것에 대한... 쇼팽은 이를 거절 하였으며 그 누가 말하는 것에 기울이지 않고 오페라나 칸타타 교향곡 등을 신경쓰지 않고 오직 피아노에만 열중 하였다.
연주회들을 통해 찬사를 받고 있던 쇼팽은 그리 만족하지는 않았다. 그러던 중 콘스탄티아의 결혼 소식을 듣게 되었다. 콘스탄티아는 죽기전에 쇼팽이 자신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장님이 되어서야 비로서 알게 되었다) 그녀의 말은 어쨋든 그는 좋은 남편이 되지 못했을 꺼야 라고 했다. 1832년즈음에는 쇼팽이 그녀를 잊어갔으나 1831년 크리스마스 즈음에도 그녀를 생각하며 괴로워 한 흔적이 남아있다. "우리는 언제나 재회하게 될 것인가. 어쩌면 재회하지 못하고 마는 것이 아닐까. 내 것강이 이렇게 나빠져 있으니 말이야.. 나는 내 정신이 아득해 지는 것을 이따금 느끼며 천국같은 평정은 느끼기도 한다. 나는 떠날 수 없는 그림자를 머리속에 그려본다. 그것은 한없이 나를 괴롬히고 있어..."
파리에서 그는 리스트(피아니스트) 와 친하게 지내었다,리스트는 격정의 피아니스트로서 천성의 미모를 가지고 사교계를 주름잡고 있었다. 쇼팽과의 정반대의 격정적인 면을 가진 천재가 서로의 본성을 이해하며 친밀하게 사귀게 된 것은 흥미있는 일이다. 쇼팽은 리스트의 우정에 보답하기 위해 <연습곡 10 번>을 바쳤다. 리스트는 그 작품의 독창성에 감격했다, 이 모든 관계들도 쇼팽의 마음을 충족시켜 주지 못했다. 쇼팽의 마음에는 항상 우수 와 고독이 가득했다. 이것이 쇼팽 음악속해서 살아 숨쉬는 특징이다. 쇼팽은 점차 안정되어 갔으며 귀족들은 쇼팽의 실력을 알고 앞을 다투어 그들의 아이를 그에게 맡기었다. 이무렵 쇼팽은 멘델스존, 하이네 등과도 친분을 갖게 되었다.
새로운 사랑 초상화를 보면 포토츠카 부인은 육채가 풍만하고 매혹적으로 보인다. 요염한 매력의 소유자라고 한다. 쇼팽은 포토츠카와의 사이에서 아이를 갖기를 원했다고 하며 그런 희망을 표시하는 것은 이 여인 한 사람 뿐이었다. 리스트는 그의 <쇼팽전>에서 쇼팽은 바깥으로는 예의상 기가 막힌 애교를 보이며 부드러운 감촉을 느끼게 하면서 진실한 감정은 마냥 감추고 있다. 라고 썼다. 쇼팽은 대중 앞에서 연주를 하게 되면 그의 아름다운 선율로 그들을 압도하였으면서도 그들을 두려워 했다.
"나는 콘서트를 열고 싶지 않다. 대중들은 나를 두렵게 만들고 있다. 그들의 호흡은 나를 초조하게 만들고 그들의 호기심에 찬 시선 때문에 나는 벙어리처럼 앉아 있다는 생각이 든다. 포토츠카 부인에 대한 기록 별로 없음..."
또하나의 사랑 쇼팽은 드레스덴을 방문했다. 마리아 보진스키 라는 여성은 알토가수 로서 쇼팽의 세 번째 여인이나 쇼팽은 그녀에게 적지 않은 슬픔을 얻게 된 것으로 보인다. . NOCTURN OP 69. NO. 2 작품 초고에 <마리아양을 위하여> 라고 되어 있으나 < 잊어 버리기 위하여 >라는 작품으로 그녀에게 드레스덴을 떠나온지 1주일 안으로 그녀에게 보내졌다고 한다.
죠르쥬 상드 1836 년 파리에서 리스트와 친구들과 어울리던 쇼팽은 산장에 놀러 갔다가 10년이란 세월을 함계보낸 여인 죠르쥬를 만나게 된다. 쇼팽은 이 여인을 첫인상을 참 안 좋게 보았다.
그녀는 남장을 하고 있었으며 그걸 본 쇼팽은 '꼴불견'이라고 까지 했다. 그녀는 끊임없는 바람둥이었다. 그러다 쇼팽을 보게 되는데 쇼팽의 나약함은 그녀의 모성본능을 자극하게 되었다.
리스트에 의하면 그녀는 쇼팽에게 가까이 지내고 싶다는 의견을 여러 차례 부탁했다고 한다. 죠르쥬 상드<나의 생애>를 보면 이 즈음 그녀는 쇼팽과 마리아 와의 관계를 염두해 두고 있다. 상드는 쇼팽을 별장으로도 초대 했었으나 그는 거절해 버렸다.
그 당시 상드가 있던 곳은 '노앙' 이라는 곳인데 상드는 1837년 3 월 쇼팽을 만나기 위해 파리로 왔다. 마리아 와의 단절은 위로해줄 상대가 필요했던 쇼팽은 그녀를 더 이상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상드는 넘치는 성애(性愛)로 그를 위로해 준 것이다.
그해 10월 쇼팽의 건강은 악화 되었다. 상드는 걱정하며 그의 건강을 회복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의 건강을 생각하여 상드와 쇼팽은 마조르카 섬이라 불리는 따듯한 섬으로 남쪽으로 갔으나 쇼팽의 병세는 극에 치달았고 사람들은 그들을 멀리했다. 이곳에서 그는 <빗방울 전주곡> < 폴로네즈 c단조> <폴로네즈 a 장조>(작품 40),<발라드 F장오 > (작품38), 완성했다.
상드는 이때의 쇼팽을 이렇게 얘기하고 있다 "가엷은 대 예술가는 사람들이 멀리하는 환자였다. 그 는 완전히 절망에 빠져 있었다. 그는 병 속에서 자기의 환상에 불안하게 동요 했으며, 그것을 극복하지 못했다. 정신이 들면 억지로 크게 웃어 제치고 작곡한 숭고함을 연주하였다." 그것은 거의 무의식에 가까운 고독과 애수와 공포에 사로잡혀 심장이 찢어 질 듯한 생각으로 작곡한 것이었는데 그는 미친 듯이 쳐대는 것이었다.
1839 년 죠르쥬 상드의 별장이 있는 곳으로 갔다. 이 조용한 곳에서 그는 명랑함과 순진성을 다시 되찾았다. 마을
사람들이 쇼팽을 좋아하게 되었다. 이 곳에서 상드를 쇼팽은 <나의 주인>이라고 불렀다. 상드는 상드 대로 쇼팽을 헌신적으로 보살폈다.
죠르쥬 상드는 문필가였으므로 쇼팽이 작곡을 하며 피아노를 치는 동안 그녀는 글을 썼다. 그당시 상드를 향한 쇼팽의 마음을 보자 "달콤한 사랑의 말처럼 맑은 나의 음악이 그녀의 곁에 있다. 오로라. 너를 위하여 나는 땅바닥을 기어도 좋다. 무엇을 하든지 너를 위해선 지나치지 않다. 내가 지쳤을 때 너의 눈길이 너의 애무가 너의 미소가 있다면 나는 너를 위해서만 살고 싶다. 너를 위해서만 정다운 음악을 울리고 싶다. 사랑하는 사람이여 너의 흐린 눈으로 너무 잔혹하게 되어 주지 말어라."
여기서 잔혹하게 되어주지 말어라는 쇼팽의 건강을 우려한 나머지 상드는 그와의 성관계를 철저하게 차단하고 참고 있었던 것이다. 노앙에서 다시 파리로 돌아온 이들은 동거를 했다. 상드는 그를 간호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가지고 있다. 1940년 쇼팽의 음악은 절정기에 달했는데 그것은 상드의 보호 아래 있었기 때문이다. 이 때 쇼팽은 상드에게 가진 생각은 이러하다 관계를 갖지 않은 이후 그녀가 내게 주는 것은 모성애에 지나지 않아요...
그녀에게 느끼는 감정은 대단한 우정이며 큰 감사이다. 그녀가 어머니를 사랑하는 것처럼 나는 그녀를 사랑한다. 이 때부터 그들의 사이는 의미가 달라져 가고 있었다. 상드는 쇼팽을 <내 어린애> 로 생각하여 그는 자기 없이는 아무것도 못한다고 생각하였다.
어쨌든 상드가 쇼팽을 보살피고 도운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은 완전한 사랑에까지는 도달하지 못했던 것은 확실하다고 할 수 있겠다. 그 원인은 쇼팽의 병에도 있었지만 어떤 점에서는 상드가 쇼팽의 병을 악화 시켰을지도 모른다는 점을 배제 할수 없다. 쇼팽의 집에는 고아한 가구들이 놓여진 방이 많이 있었다.
상드와의 이별
우리는 지금까지 병으로 앓는 쇼팽을 상드 혼자만이 보호하고 도운 것으로 알아왔다. 그러나 실제로 이혼한 상드를 도와 그 아이들에게 애정을 쏟아 주었고 경제적인 면에서도 많은 작곡료와 레슨비로서 가정을 꾸려갔던 것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것처럼 상드의 일방적인 희생으로 쇼팽이 살아간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쇼팽이 많은 면에서 상드에게 도움을 준 것은 사실이었다.
정신적인면에서도 쇼팽은 상드의 강렬한 성격에 안정감을 가졌던 반면에, 잔혹한 성격에 예민하고도 연약한 쇼팽의 신경이 많이 손상된 것도 사실인 것이다. 그리고 그녀 쪽에서 냉혹한 결별의 선언을 한 것이다. 그렇게 긴 세월을 함께 살고 나서 냉정하게 끊을 수 있다는 것은 상드 같은 성격에서나 가능 한 것이지 쇼팽과 같은 연약한 성격으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의 태도에 대해 쇼팽은 상드가 자기와 딸을 둘다 귀찮아서 처리하고 싶었던 것으로 새각했다. 1년 후에 그들은 한 번 마주치게 된다. 그 때의 상드의 글을 보면...
"그 사람과(쇼팽) 1848 년 3월에 잠깐 만났습니다. 떨며 얼어 붙은 것과 같은 그 사람과 악수를 했습니다. 이야기를 하려고 하였지만 그는 달아나 버렸습니다. 나는 이미 그 사람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고 말해주려고 했으나그가 괴로워 할 것을 생각해서 그만 두었습니다. 이제 두 번 다시 그와 만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1848년 2 월 16일 쇼팽은 파리에서의 최후의 콘서트를 가졌다. 1 주일 전부터 매진이 되었다. 쇼팽은 심한 기침과 발작으로 두려워 했었다... 년만에 대중 앞에 선 쇼팽은 자신이 없어했던 것이다. 연주를 하기 시작하여 모차르트의 3 중주곡, 쇼팽의 녹턴 바르카롤라, 에튀드, 프렐류드... 그리고 마지막으로 왈츠 연주 때는 청중들의 갈채가 절정에 도달하여 앙콜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연주가 끝나고 쇼팽은 숨이 끊어질 정도로 아팠다. 그 때의 비평가들은...요정은 약속을 지켰다. 대단한 성공, 대단한 열연으로 지켜진 것이다. 이 지상에서 비유할 데 없는 그의 연주의 신비성을 말한다는 것은, 그가 받은 환영이나 황홀에 대해 말하는 것보다 훨씬 어렵다.쇼팽은 여행차 영국엘 다녀와서 건강의 최대 위기를 맞는다. 병상에 누워서 끝내 보고 싶어했던 사람은 조르쥬 상드였다..
"다시한 번 만날 수 없을까..?...누구보다 만나고 싶은데..." 상드는 쇼팽이 영국에서 파리로 왔다는 소식을 듣고 "당신의 친절한 추억을 생각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소식을 주세요. 라고 편지를 썼으나 쇼팽의 병간호를 하고 있었던 누이는 그것을 전해주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죽은 뒤에 만일 쓰다가 만 작품이 발견되거든 불에 태워 없애 버려 주세요. 나는 사람들을 존경하고 있어요. 그러므로 내 노력은 깨끗하게 끝을 맺어야 합니다. 헌데 나는 이제 그것은 마저 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사람들이 알고 있는 내가 아무런 가치도 없는 작품을 남겨 두었거나, 또 그런 작품이 널리 알려지는 것을 두려워 합니다. 그러니까 나의 이 부탁을 꼭 들어 주세요...." 그 옆에서 그의 병세를 듣고 달려온 포토츠카 부인의 눈에서는 끊임없는 눈물이 흘러 내리고 있었다.
쇼팽의 죽음
쇼팽은 마지막으로 무엇이든 음악을 듣기를 원했다. 연주할 사람이 "그럼 당신의 소나타를 쳐 드리겠습니다."
쇼팽은 말했다.
"내 것말고 더욱 순수한 음악을.... 내 맥박이 멈추기 전에 내가 가장 존경하는 모차르트의 곡을 쳐 주시오.."
10월 17일 오전 2시경에 그는 떠났다.
리스트의 <쇼팽전>, 죠르쥬 상드 <나의 생애>, 쇼팽의 수많은 편지들을 참고 하였음을 밝힙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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