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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로그란?>

(30) 엇비슷한 세상 건너는 법

디지로그 시대가 온다 30. 엇비슷한 세상 건너는 법
디지로그와 아날로그 결혼


엇비슷이라는 한국말을 알면 미래의 세상이 보인다. '엇비슷'의 '엇'은 '엇박자'의 경우처럼 서로 다른 것들의 이질성을 나타내는 말이다. '비슷'은 더 말할 것 없이 엇과 반대로 같은 것의 동질성을 의미한다. 이렇게 다른 것과 같은 것의 대립 개념을 하나로 결합시킨 것이 한국 고유의 '엇비슷'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엇'은 1과 0의 디지털과 같고 '비슷'은 일도양단으로 끊을 수 없는 연속체의 아날로그와 같다. '엇비슷'에서 '엇'만 보는 사람이 디지털인이고 '비슷'만 보는 사람이 아날로그인이다. 양자를 함께 보는 인간만이 디지로그의 미래형 인간이 된다.

디지로그형 인간이 어떤 사람인지 알려면 시골 아이들에게 "너의 어머니 어디 가셨니?"라고 물어보면 안다. 일본과 중국 애들은 외출했다고 하고, 영어를 하는 아이들은 "쉬 이즈 아웃"(밖에 있다)이라고 할 것이다. 그런데 유독 한국 아이만은 "나들이 가셨어요"라고 할 것이다. 나들이는 '나가다'와 '들어오다'의 대립어를 한데 합쳐놓은 말이다. 그러고 보니 정말 어머니의 외출은 '나가면서 동시에 들어오는 행위'가 아닌가. 그렇지 않다면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 가출이다. '지금' '여기'의 시점에서 벗어나 차원이 다른 눈으로 보면 분명 나가는 것과 들어오는 것은 하나다.

단군 할아버지에 대해 물어보면 이번에는 "곰이 사람이 돼 하늘님 아들과 결혼하는 이야기"라고 할 것이다. 이렇게 명쾌한 것을 어른들은 그동안 얼마나 복잡하게 답하려고 했는가. 지상에 있는 곰은 '검'고 하늘의 환웅은 '환'하다. 곰이 동굴의 어둠이며 밤이라면 환웅은 빛이며 대낮이다. 곰은 낮은 땅에서 올라가고 환웅은 높은 하늘에서 내려온다. 높고 낮은 것, 열린 것과 닫힌 것, 그리고 빛과 어둠이 결혼한 자리에 엇비슷한 세상 신시가 열린다. 너무 가까운 것끼리는 결혼하지 못한다. 그래서 어둠과 빛 사이에서 단군의 새벽은 탄생한다. 그리고 좁은 동굴과 무한한 하늘이 합쳐 아사달의 공간을 만든다. 그것을 우리 어린 것들이 알고 있는 것이다.

그래, 곰이 사람이 되는 이야기다. 곰은 그냥 곰으로 있는 것(being)이 아니다. 무엇인가가 되는 생성물(生成物.becoming)이다. "내가 돌이 되면 돌은 연꽃이 되고 연꽃은 호수가 되고, 내가 호수가 되면 호수는 연꽃이 되고 연꽃은 돌이 되고"라는 미당의 시 구절은 영원히 생성되면서 순환하는 단군의 이야기와 같다. 밤이 아침이 되고 아침은 대낮이 되고 대낮은 황혼의 저녁이 되면서 밤이 된다. 그래서 한국 사람은 사람을 평가할 때도 '사람이 됐다' '못됐다'고 한다. 한국 음식 역시 '있는 맛'이 아니라 입안에서 '되는 맛'이다. 씹어야만 비로소 싱거운 밥과 짠 김치가 한데 어울려 김치맛이 되고 밥맛이 '된다'. 그러니 누가 김치맛과 밥맛을 따로 분간할 수 있겠는가.

"군(君)다이 신(臣)다이 민(民)다이"라고 노래한 충담사(忠談師)의 안민가 역시 '되다'의 세계를 읊은 것이다. '다이'란 말은 '답다'로 '되다'와 같은 뿌리에서 나온 말이기 때문이다. '대통령이 된다'는 것은 곧 '대통령다워진다'는 말이고 한국인이 된다는 것은 바로 한국인다워진다는 말이다. 더 나아가 사람이 된다는 것은 사람다워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한국 사람은 누구나 위급한 일을 당하면 "사람 살려"라고 외친다.

일본 사람처럼 그냥 '살려(助けてくれ)'가 아니라, 서양 사람처럼 '나 살려(help me)'가 아니라 '사람'을 살리라는 것이니 어디에서나 통하는 글로벌 스탠더드다. 이 지상에는 천만 가지 구호가 있지만 한 마디로 줄이면 사람과 그것을 살리는 생명문제일 것이다. 사람을 살리면 디지로그 시대가 오고, 컴퓨터를 못하는 노인도 더 이상 구박받지 않는 세상이 '된다'. 젊음의 열정은 엔진은 돼도 방향을 잡는 키가 되기는 어렵다. 사이버의 본뜻이 '키잡이'이듯이 배가 좌충우돌할 때 희망의 땅으로 갈 수 있도록 균형을 잡아주는 것은 기성세대다.

그러나 강을 다 건넜으면 타고 온 뗏목은 버려야 한다. '되다'는 말 못지않게 버리란 말을 잘 쓰는 한국인이 아닌가. 잊어버리고 놓아버리고 내버리라고 하지 않는가. 무거운 뗏목을 메고는 아날로그와 디지털이 결혼하는 저 신시(神市)의 땅으로 갈 수 없다. 눈물 나게 배고팠던 이 민족에 경제성장의 기적을 만들어 준 자랑스러운 주역들, 짐승처럼 억압받고 살던 사람들에게 민주화의 빛을 밝힌 용감한 주역들, 그러나 이들이 자신을 버려야 또 하나의 새벽이 온다. 천방지축 달리는 위험한 아이들도 의젓한 어른이 '되어' 이 강가로 올 것이다. 그리고 마음에 드는 뗏목을 골라 강을 건널 것이다. 그날을 위해 나도 이제 이 글을 메지 않고 이곳에 버리고 간다.

이어령 중앙일보 고문


                                                                                                       2006. 2. 4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