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트로피는 늘지 않는다.
복잡한 의미를 가진 과학 용어가 본래의 의미를 벗어나 사용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 에너지와 엔트로피가 대표적인 경우다.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이라는 뜻의 에너지는 일반명사가 돼 버렸고, '무질서도(度)'라는 뜻의 엔트로피는 사회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현대 문명의
여러 문제를 분석하는 중요한 도구로 자리를 잡은 모양이다.
인간은 자연에서 관찰되는 다양한 현상의 근본적 원인을 알아내고 싶어하는
유별난 존재다. 우리는 자연현상을 자연의 '섭리(攝理)'라고 순순히 인정하는 대신 그 이유를 체계적으로 분명하게 밝혀내려 노력한다. 그런 일에
목숨을 걸기도 하고, 엄청난 비용을 투자하기도 한다. 과학은 그런 노력으로 이룩된 우리 모두의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우리가 과학을
통해 밝혀내려는 자연현상이 모두 거창한 것은 아니다. 누구나 당연하게 알고 있는 익숙하고 하찮은 현상이 훨씬 더 이해하기 어려운 문제가 되기도
한다.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고, 물속에 떨어뜨린 잉크 방울이 퍼져나가는 것이 바로 그런 경우다. 너무 당연해 누구도 그런 일이
거꾸로 일어나는 모습은 상상하지 못한다. 물이 높은 곳으로 올라가 폭포처럼 떨어져 내리는 모습을 그린 네덜란드 화가 모리츠 에셔의 판화
'폭포'가 기묘하게 느껴지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엔트로피는 1850년에 독일의 클라우지우스가 자연에서 저절로 일어나는
변화의 방향을 설명하려고 처음 도입한 열역학 개념이다. '우주의 엔트로피는 언제나 늘어난다'는 유명한 열역학 제2법칙이 바로 그것이다.
우주(宇宙)에서 저절로 일어나는 변화는 반드시 우주의 엔트로피가 늘어나는 방향으로만 진행된다는 뜻이다. 엔트로피가 물질을 구성하는 입자들의 양자
상태가 무질서한 정도를 나타낸다는 사실을 알아내기까지는 반세기의 세월이 걸렸다.
언젠가부터 열역학 제2법칙을 문자 그대로 해석해
현대 문명 사회의 분석에 응용할 수 있다는 어느 미래학자의 주장이 관심을 모으기 시작했다. 우리 사회의 엔트로피도 끊임없이 늘어나고 있고,
에너지를 지나치게 소비하는 우리의 무분별한 생활이 엔트로피의 증가를 가속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엔트로피가 더 이상 증가할 수 없는 엄청난 재앙에
도달하기 전에 우리의 생활을 근본적으로 혁신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인 모양이다.
우리의 현대 문명에 많은 문제가 있는 것은
분명하다. 우리의 문명도 자칫하면 이스터 섬의 경우처럼 한순간에 사라져 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열역학이 그런 종말을 예측하고 있다는 주장은
크게 잘못된 것이다.
우선 엔트로피가 언제나 증가하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액체의 물이 얼어 얼음이 되는 경우에는 엔트로피가
줄어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섭씨 0도 이하의 온도에서는 물이 저절로 얼게 된다. 물론 열역학 법칙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물이 어는 경우는
열역학 법칙이 그대로 적용되는 '우주'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 경우의 우주는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가 아니라 물질과 에너지의 출입이 불가능한
'고립계(界)'를 뜻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처럼 물질과 에너지의 출입이 가능한 '열린계'에서는 엔트로피가 반드시 늘어나야 할
열역학적인 이유는 없다. 실제로 얼음이 저절로 어는 현상이 그런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 주고 있다. 결국 열역학 법칙이 엔트로피 증가에 의한 우리
사회의 종말을 예언하는 것은 아닌 셈이다. 철저한 실험을 통해 정립된 과학 이론이 엄청난 설득력을 발휘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잘못 적용하면
엉뚱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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