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커와 크래커
흔히 1946년 미국에서 개발된 에니악(ENIAC)을 세계 최초의 컴퓨터로 알고 있지만 사실 그게 아니다. 농경사회를 디지털 유목사회로
바꿔놓은 선각자의 영예는 영국 수학자 앨런 튜링에게 돌아가야 옳다. 그는 2차 세계대전 중 독일의 무선통신 암호 '에니그마'를 해독하는 영국
첩보조직 '울트라 프로젝트'팀의 일원이었다. 그가 만든 전자계산기 '콜로서스(Colossus)'는 당시 연합군 진영에서 두 손 들었던 에니그마를
무용지물로 만들었다. 어찌나 빠르고 정확했던지 암호가 해독되고 있다는 걸 숨기기 위해 독일군의 폭격계획을 알고도 지켜봐야 하는 경우마저
있었다.
종전 후 울트라팀은 해체됐고 콜로서스를 비롯한 모든 증거물이 파기됐다. 차후 다시 써먹을 것을 기대한 영국 정부가 울트라
프로젝트를 극비에 부쳤기 때문이다. 튜링은 종전을 앞당긴 공적도 인정받지 못한 채 콜로서스보다 2년도 더 늦게 나온 에니악이 영광을 가로채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튜링을 '세계 최초의
해커'라 규정하는 것이 그에게 조그만 위로가 될 수 있겠다. 튜링 이후 컴퓨터는 전 세계의 창조적 두뇌들을
유혹했다. 자의식 강한 몇몇 프로그래머가 순전히 재미로 소프트웨어를 만들고 즐겼다. 이들에게 해커란 이름이 붙은 것은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가 2세대 컴퓨터 PDP-1을 구입한 61년이다. MIT의 철도 시스템 연구 동아리인 테크모델철도클럽 학생들이 밤마다 몰래
학교 컴퓨터를 갖고 놀았다. 그들은 자신만의 장난감으로 오늘날 우리들이 쓰고 있는 프로그래밍 도구, 주변 환경, 관련 은어들을 만들어냈다.
자신들을 해커라 불렀다. 컴퓨터로 노는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이후 해커들은 많은 유용한 프로그램을 개발했다. 80년대 들어 이들에게 '진정한
프로그래머'라는 별명이 붙여진 이유다. 애플 컴퓨터를 창업한 스티브 워즈니악과 스티브 잡스, 마이크로소프트를 만든 빌 게이츠가 그런
인물들이다.
이들은 창조적 열정을 지녔다는 점에서 네트워크에 침입해 바이러스를 뿌리고 다른 사람의 자료를 파괴하는 크래커(cracker)와 구별돼야 한다. 제다이와 다스베이더의 차이다.
그런데 지난해 대입 원서접수 마비 사태가 수험생을 비롯한 크래커 탓이라는 소식은 가슴을 답답하게 한다. 창조적 해커가 되라고 컴퓨터를
사줬더니 파괴적 크래커의 길을 먼저 선택했다. 고작 남의 접수를 막기 위해서였단다. 못난 송아지, 못된 짓 먼저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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