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디지로그란?>

(9) SHELL 은 정보시대 약방문

디지로그 시대가 온다 9. SHELL은 정보시대 약방문



SHELL은 조개도 석유회사 이름도 아니다.

소프트웨어의 S, 하드웨어의 H, 그리고 환경(environment)의 E와 인간을 의미하는 라이브웨어(Liveware)의 L자의 머리글자를 짜맞춰서 만든 항공관계의 휴먼팩터의 모델이다.

원래 버밍엄대 교수였던 앨빈 에드워즈가 만든 당시(1972)에는 라이브웨어가 하나밖에 없었던 것을 뒤에 프랭크 호킨스가 L 하나를 더 집어넣어 개선한 것이다. 본인 자신이 KLM의 기장 출신이어서 자신의 현장경험을 토대로 라이브웨어를 더 세분한 모델을 만든 것이다.

비행기를 보면 누구나 처음에는 그 기계에 정신이 쏠린다. 조종실에 들어가도 조종사는 보이지 않고 빡빡하게 들어찬 수백 개의 계기와 조종 스위치가 눈에 띈다. 그러나 조금만 정신을 차리고 나면 그러한 기계들을 움직이는 매뉴얼이나 항법지도와 같은 소프트웨어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알게 된다. 그리고 조종석에 조종사가 앉기 전에는 최신형 비행기도 달구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도 알게 된다. 아닌 말로 라이브웨어(조종사)가 파업을 하게 되면 비행기의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는 헌신짝이다.

그렇다고 조종사 혼자서 하는 것도 아니다. 부조종사와 기관사가 있고, 객실에는 스튜어디스와 승객도 있다(그래 가끔 손님 중에는 하이재커나 테러리스트가 있다). 그리고 하늘만이 아니라 지상에 있는 정비사와 회사 임원들의 도움을 받는다. 그래서 자연히 라이브웨어는 하늘과 땅의 두 영역으로 나뉠 수밖에 없다. 그리고 하드, 소프트, 라이브의 세 웨어는 콕피트(cockpit)라 불리는 조종실의 공간과 기상과 기류 조건의 하늘 환경의 영향을 받는다.

그러므로 만약 그중 한 글자라도 이가 빠지거나 궁합이 안 맞으면 비행기는 그 자리에서 추락하고 말 것이다. SHELL이 HELL(지옥)이 되고 비행기는 고철로 SELL된다. 말장난을 할 때가 아니다. 실제로 1977년 3월 카나리아 군도의 활주로에서 네덜란드의 KLM과 팬암의 두 보잉-747기가 충돌해 583명이 죽었다. 항공사상 유례없는 이 대참사 이후 총제적 시점으로 비행기를 바라보는 SHELL 모델은 급속히 부상하게 된다.

사고의 원인은 농무(濃霧-E), 관제탑과의 교신 때 일어난 오해와 혼신(混信-노이즈 H-S)이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기장과 기관사의 인간관계(L, L)라는 라이브웨어였다. 이륙하려던 기장에게 기관사는 아직 팬암기가 활주로에 있을지 모른다고 귀띔을 했다. 만약 기장이 기관사의 말을 존중해 그 말을 좀 더 귀담아 들었더라면, 혹은 그 기관사가 기장의 권위에 눌리지 않고 자신의 의견을 강하게 주장했었더라도 많은 사람의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하드웨어 중시의 사회에서 라이브웨어(인간)의 중요성을 알리는 대목이다.

그래서 SHELL 모델은 비행사고의 규명이나 조종사와 정비사의 훈련에만 유효한 모델이 아니다. 열차, 선박 등 모든 승용물의 경우에도 적용된다. 바퀴를 보면 돌리고 싶다는 시인의 말대로 승용물들은 인간의 욕망과 뗄 수 없는 관계가 있다. 그래서 인간은 자신의 몸, 가족 그리고 회사와 나라 역시 하나의 배나 비행기로 생각한다. 인류 전체가 분당 약 27㎞의 스피드로 회전하는 지구호를 타고 하루를 운항한다. 왜 우리는 침몰한 지 100년이 넘는 타이타닉호에 그리도 집착하는가. 왜 아이들은 은하철도와 비행접시의 환상에 빠져 있는가.

항공의 SHELL 모델을 응용하면 정보사회의 하드웨어, 소프트웨어 그리고 디지털 환경, 라이브웨어의 내.외 다섯 요소를 총체적으로 분석할 수 있다. 당연히 디지로그 시대의 현상을 읽을 수도 있고 창조할 수도 있는 한국형 모델을 만들어 낼 수가 있을 것이다.


이어령 중앙일보사 고문
  2006.01.09 20:03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