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여름에 내가 <여자 정혜>를 만난건 순전히 행운처럼 여겨진다.
요즘 들어 만난 영화 중에서 <섹스와 폭력과 욕설과 반전>이 빠진 영화를 보기 힘들었는데
이 영화에는 그 모든 것이 다 빠져 있었다.
아니 제외되어 있었다는 말이 더 어울린다.
<여자 정혜>는 식물성의 여자라서인지
동물적인 감각을 지닌 나와는 매우 다르면서도
그러나 또한 매우 닮은 느낌이었다.
모든 여자들이 선망하는 가늘고 긴 목선에 하얀 피부,작고 예쁜 귀까지.
게다가 그녀의 손가락은
또 얼마나 하얗고 가늘던가.
그녀의 발목만큼이나 가늘고 섬세한 몸은 그녀의 몸이 사랑 받고
사랑하기에 매우 좋은 몸이란걸 증명하는 것 같았다.
올 여름.
내가 아침마다 산책하면서 은밀히 엿본 것은 남자의 몸이 아니라 여자의 몸이었다.
같은 여자가 여자를 훔쳐보았다고 한다면 좀 외설스럽지만 사실이 그렇다.
나는 수많은 여자들을 훔쳐보고 또 훔쳐보았다.
마치 영화 속의 <여자 정혜>를 훔쳐보듯이 여자들의 몸을 훔쳐보고 여자들의 귀밑머리를
훔쳐보는가 하면 여자들의 하이힐을 신은 발목이나 종아리를 훔쳐보기도 했다.
때로는 엘리베이터를 함께 탄 젊은 여인의 나시 티 밑으로 드러난 겨드랑이 샅과 그 밑의
그늘진 부분까지도 은근슬쩍 들여다 보기도 했다.
아, 세상의 모든 여자란 !
내가 내린 결론은 세상의 모든 여자는 아름답다는 결론이었다.
여자가 뚱뚱하건 날씬하건간에 모든 여자란 나름대로 아름답고 나름대로 매혹적이었다.
여자의 둥그런 목선에서부터 등까지 이어지는 선도 예쁘지만 여자의 아름다움은
뭐니 뭐니 해도 여자의 뒷모습에 있었다.
특히 여자의 풍만한 엉덩이 부분은 단언컨대 어느 여자나 다 예뻤다.
여자가 젊은 여자건 애를 여럿 낳은 중년의 여자건 간에,아니 이미 백발이 성성한
초로의 할머니들조차도 모두 다 아름다왔다.
남자들의 뒷모습이 빈약한 것에 비한다면 여자들은 그야말로 각양각색의 미를 온 몸으로
여실히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 풍성한 아름다움을 보고 반한 뒤에 내린 결론은 '아..여자로 태어나길 잘했다!'였다.
모든 여자들이 <여자 정혜>처럼 비록 뽀시시시하고 날씬하진 못해도 모든 여자란
그 품 안에 하나의 깊은 그늘을 가진 존재처럼 여겨져서 그런지도 모른다.
세상의 모든 여자를 보면 완전히 밝은 여자도 완전히 어두운 여자도 없듯이 <여자 정혜>는
처음에는 적당히 게으르고 적당히 세상과 타협하는 여자인듯 했다.
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을 쓸어내고 청소를 하기보다는 손으로 쓱쓱 주워서 거실 탁자에
아무렇게나 올려놓고 보던 텔레비젼을 계속 해서 보는 모습은 우리 여자들의 참모습이다.
모든 여자들이 반들 반들하게 걸레질을 잘하는 것이 아니듯이 나 또한 혼자 산다면
그럴 것이다.그저 며칠에 한 번,혹은 생각날 때 하는 것이 청소일 것이다.
특히 혼자 먹는 밥이란게 늘 그렇듯이 허기짐을 해결하는 생존의 욕구인듯 여자 정혜는
김밥을 먹으면서 야채(오이)를 골라내고 컵라면의 국물을 국 대신에 홀짝이고
그러면서 총각김치를 손으로 집어 올려 우물거린다.
총각 김치를 손으로 집어먹고 그 손을 제대로 닦는 여자란 별로 없다.
그저 혀로 핥았거나 자신의 앞치마에 문지르거나 그냥 내버려 두었을지도 모른다.
여자란 멀리서 볼 때가 더 아름답고 더 뽀얗듯이 가까이 다가가서 현미경을 들고
살핀다면 모든 여자란 그저 다 비슷하게 아름답고 비슷하게 추할 것이다.
<여자 정혜>는 그런 면에서 볼 때 현미경을 들고 찍은 피사체였다.
여자란 외로우면 뭔가를 키운다.
특히 나무나 고양이는 외로운 사람들에게는 빼놓을 수 없는 친구가 되기도 한다.
<여자 정혜>가 벤자민 하나 하나의 잎사귀에 물을 뿌리고 먼지를 닦는 장면에서
나는 그녀의 진한 외로움을 보았다.
나 또한 언젠가 세상이 외롭고 적막한 기분이 들었을 때 벤자민 잎새 하나 하나에 물을 뿌리고
그 잎새의 먼지들을 닦아 낸 적이 있었다.
가끔은 물이 아니라 우유를 뿌려서 닦은 적도 있었다.
온 세상의 의미를 거기에서 찾기라도 하듯이...벤자민의 잎새 하나 하나 마다 숨결을
불어 넣고 그 잎새에 묻은 먼지들을 닦고 또 닦았다.
마치 외로움을 지우듯이....
나보다 더 부지런한 여자들은 벤자민 잎새 대신에 행주나 걸레에 숨결을 불어 넣는다는 것도
그때서야 알게 되었다.
가스렌지 사이에 넓은 냄비를 올려놓고 행주를 삶고 온갖 속옷과 걸레를 삶으면서 부지런한
그녀들은 자신의 외로움을 지워나간다는 것을....
우리 엄마 처럼.
옆집의 그녀들처럼.
그녀들의 외로움이 세제 냄새와 뿌연 습기 사이로 가볍게 날아 올라갔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행주와 걸레 대신에 그저 키 큰 벤자민을 말 없이 선택했을 뿐이었다.
다만 그 벤자민에 의미를 부여한다면 그 벤자민은 보기 드문 연리지 나무였고
그 성성한 두 몸을 한 몸처럼 얽히고 서있는 모습에서 나는 알 수 없는 무언가를 갈망했다.
마치 연리지에 영혼이 든 것 처럼 나무에게 나의 절망을 얘기했으며 나의 외로움을 속삭였다.
마치 <여자 정혜>처럼.....
며칠 전 어린 딸이 내 발톱을 들여다 보다가 뜬금없이 소리친다.
"와,엄마 발톱은 왜 이렇게 예뻐요.발가락도 귀엽고요!"
나는 솔직히 손톱과 손이 예쁘다는 소리는 예전에 많이 들었다.(지금은 그 손도 늙고 있다)
그런데 발톱과 발가락은 단 한 번도 예쁘다거나 귀엽다는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었고
그걸 세심하게 들여다 본다는 것 또한 나에게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런데 어린 딸은 내 발톱 마저도 유심히 바라보다니...갑자기 엄마로서의 자괴감이 들어서
나도 내 딸들의 발톱을 거의 안보다가 괜스리 유심히 들여다 보게 되었다.
그애들의 손톱이 예쁜 것 만큼이나 발톱이 예쁘기를 기대하면서 ....
그리고는 그저 다분히 아부성을 섞어서 말해 주었다.
"아, 너희들의 발톱이 예쁜 걸 보니 나중에 다 잘 살겠다!"
<여자 정혜>에서 그녀의 친정 어머니는 이런 말을 딸에게 쏟아낸다.
"얘,너는 발톱이 안 이쁘다.발톱이 예뻐야 나중에 잘 산다는데....."
<여자 정혜>는 솔직히 첫 결혼에 실패한 독신녀이다.
그녀는 첫경험에 실패한.... 그래서 첫결혼에도 실패한 그런 약하고 불행한 여자인 것이다.
여자에게 첫경험이란 과연 무엇일까.
그건 첫사랑만큼이나 강한 의미를 지닌 것인지도 모른다.
<여자 정혜>의 순결을 앗아간 사람은 어린 시절,그녀의 친척뻘 되는 나이 든 남자였다.
<여자 정혜>가 낮잠을 자고 있을 때 그녀는 자신의 순결을 그리고 첫경험을 날선 벼락처럼
치르어 내었다.그것은 설레임도 아니며 한 순간의 달콤한 떨림도 아닌 격렬한 바람처럼 몰아친
어지러운 소용돌이일 뿐이었다.
여자 정혜가 그 어지러운 소용돌이 안에서 어찌 견딜 수 있었을까.....
그 상흔을 보듬어줬어야 할 남자는 첫 결혼식의 신혼 여행에서 그저 호기심에 질문을 던진다.
"첫 경험이 어땠어?
뭐 처음이 아닐 거 아냐?
그러니까 처음이 어땠냐고?"
여자 정혜는 "그냥 아팠어요"하고는 트렁크를 들고서 새벽에 그를 떠난다.
아아 제발.....
제발이다......!
남자들은 제발이지 여자들에게 첫경험을 물어보지 좀 말아달라.
그 첫경험이 누구에게나 환희롭고 누구에게나 황홀한 것이 아니듯이
여자에게 있어 첫경험이란 언제나 아픈 것이다.
자신이 선택해서 ..무작정 끌려서 치른 첫경험 조차도 아주 오래 오래 아픈 것이다.
그것은 육체적으로 아프기도 하지만 정신적으로는 더욱 더 아프다.
<여자 정혜>가 다만 발톱이 안 예쁜 이유로 첫결혼이 끝난 것이 아니듯이 그것은
자신이 어쩌지 못하는 숙명같은 아픔인 것이다.
그 아픔을 모르거든 그 아픔을 대신 해 줄 것이 아니라면 차라리 그저 침묵하라고 ....
여자의 자궁 속으로 들어 갈 생각이 아니라면 침묵이 그들을 구원했을 지도 모른다.
설혹 그 자궁 안에서 다른 정액의 씁쓰레한 맛이 느껴진다는 환각이 들어도 남자는 침묵하고
그녀를 보듬어 주었어야 한다.
세상의 여자란 그렇게나 약하고 아프고 깨지기 쉬운 질그릇인 까닭이다.
그 깊고 깊은 아픔을 누군들 알 수 있을까만은....
적어도 그 첫 기억을 여자 앞에서 물어보지는 말아야한다.
그녀가 스스로 얘기하기 전 까지는....
이렇듯 사람에게 절망을 주는 것도 사람이고 사람에게 희망을 주는 것도 사람이다.
<여자 정혜>가 혼자 먹던 밥그릇을 치우고
그 자리에 고양이를 키운 것은 희망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고
그녀가 나무를 키우는 것도 희망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가끔은 낯선 남자를 집에 불러 들여서라도 자신을 찾아가려던 그녀는 처음으로 남자를 위해
장을 보고 남자를 위해 음식을 만든다.
혼자 먹는 음식은 누군가 혼자하는 섹스와 같다고 하지 않던가.
<여자 정혜>가 음식을 만들고 집 안을 어지럽힐 때 그녀의 표정은 비로소 생기가
도는 듯 했다.
그 순간이야말로 그녀가 사람처럼 보이기도 한 순간이엇다.
정물화처럼 고요하던 그녀가 한 순간 살아 숨쉬는 여자로 보여졌다.
그녀의 손에 힘줄이 잡히고 발에도 힘줄건이 당겨지면서 그녀는 정물화에서만 숨쉬던
화석같은 존재가 아니라 어느새 울고 웃으며 화내는 여자가 되어 있었다.
세상에 반응하고 남자에게 곧바로 반응하는 ...그런 <여자 정혜>.
<여자 정혜>가 또 다시 세상에 절망하고 남자에 절망할지도 모르지만 그녀가 찾은 것은
희망이었고 다시 찾은 것 또한 사람이었다.
그렇다.
결국은 늘 사람만이 희망이다.
-蘭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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