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조 : 이 황[李璜]
2> 본관 및 시조의 유래
고성은 경상남도 남부 중앙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본래 6가야중 소가야의 도읍이었는데
신라시대에 고자군으로 불리우다가 고려때 철성부로 개칭되었으며, 조선때 고성현이 되었고, 1895년(고종 32) 고성군이 되었다.
[이씨추원록(李氏追遠錄)]에 의하면 고성이씨(固城李氏)는 한나라 문제때 사람인
이반(李槃)의 24세손 이황(李璜)을 시조로 받들고 있다. 그는 고려때 밀직부사를 역임하고,
1033년 거란이 침입했을때 공을 세워 문종때 호부상서에 올라 철령군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은 그를 1세조로 하고 본관을 고성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왔다.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맥으로는 시조의 7세손으로 고려 충렬왕때 판밀직사사를 지낸
존비(尊庇)와 그의 아들 우(瑀)가 유명했다.
우(瑀)는 벼슬이 병부의 판사와 경령전의 서장관사에 이르렀으며 나라에 공을세워
철성부원군에 봉해져서 크게 명성을 떨쳤었고, 그의 아들 암과 교(嶠)가 뛰어났다.
암은 충정왕때 우정승을 지냈고 글씨에 뛰어나 동국(東國)의 조자앙(趙子昻)으로 불리웠으며
동생 교(嶠)는 공민왕때 형부상서)를 거쳐 어사대부에 올랐다.
조선조에서는 행촌 암의 아들 4형제 중 장남 인(寅)은 고성군에 봉해졌으며,
차남 숭(崇)은 공민왕때 궁술로 무명을 떨치고 조선이 개국되자 태조때 검교시중에 올라,
대제학을 지낸후 서예로 필명을 떨쳤던 아우 강(岡)과 함께 가세를 일으켰다.
강(岡)의 아들 원(原)은 태종때 좌명공신으로 철성부원군에 봉해졌고, 이어 병조판서와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에 올랐다.
원은 슬하에 대(臺),곡(谷),질,비,장(場),증(增),지 등 일곱아들을 두었는데, 이들이 모두
크게 현달하여 가문에 중추적인 인맥을 형성했다
좌의정 원(原)의 증손 주(胄)는 정언을 지내고 시문으로 명성을 떨쳤으나 갑자사화때
진도에 유배되었다가 피살되었고, 그의 아우 여는 임금이나 조정에서 크게 촉망받다가
안질로 29세에 요절했다. 그외 명종때 병조 판서를 지내고 판돈령부사를 지낸 명규(名珪)가
사어(활쏘기와 말타기)에 능하고 서예에 뛰어났으며 예조참판에 이르렀다.
한말에 와서는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대한자강회(大韓子强會)를 조직하여 민중계몽과
항일운동에 앞장섰던 기(沂)가 을사오적신(이완용·박제순·이지용·이근택·권중현)의 암살을
결행하다가 실패하고 진도로 유배되었으며, 독립운동가로 이름났던 덕수(德秀)는 임시정부가
설립되자 평북 독판(平北督辦)에 임명되어 상해 임시정부의 국무령을 지낸 상의(象義),
상룡(相龍)과 함께 의절의 전통 가문인 고성이씨를 더욱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고성이씨(固城李氏)는 남한에 총 17,571가구,
71,91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3> 집성촌
경기도 화성군 팔탄면 하저리
평북 삭주군 외남면 송남동
경북 청도군 금천면 금전동
경기도 화성군 향남면 증거리
경남 고성군 동해면 외곡리
경북 청도군 금천면 방지동
고성이씨와 환단고기(신동아9월호 권말부록"환단고기의 진실"중에서 발췌)
이유립(李裕?·1907~1986)은 평북 삭주에서 태어났다. 여기서 주목할 것이 삭주라는 지방이다. 삭주는 중국과의 국경선인 압록강변에 있는데, 이곳에서 5km쯤 떨어진 곳에 수풍댐이 있다. 그의 부친인 이관즙(李觀楫)은 5남3녀를 뒀는데 이유립은 이 중 다섯째, 아들로는 4남으로 태어났다. 이유립의 재능이 출중했기 때문인지 부친은 다른 아들들은 농사를 짓게 했으나 그에게만은 한학을 공부시켰다고 한다.
이유립은 여섯 살 때 ‘동몽선습’을 공부했는데 동몽선습에는 ‘한나라의 무제께옵서 이를(위만조선을) 토멸하시고’라는 ‘한무제 토멸지(漢武帝 討滅之)’라는 문구가 있다. 이유립은 이 부분에서 “우리나라를 멸망시킨 자를 중심으로 한 글을 읽기 싫다”며 동몽선습 공부를 중단했다고 한다. 여섯 살짜리 꼬맹이가 이러한 역사의식을 갖게 된 것은 그의 집안 내력과 관계가 있는 것 같다.
이유립의 본관은 경남 고성(固城)인데, 그가 경남 고성이 아닌 평북 삭주에서 태어난 데는 까닭이 있었다. 그가 환단고기를 전하게 된 것도 삭주에서 태어난 고성 이씨라는 사실이 큰 영향을 끼쳤으므로 고성 이씨 가계도를 살펴보기로 한다.
유·불·선에 능통했던 이암
고성 이씨는 고려 덕종 때의 인물인 이황(李璜)을 시조로 한다. 이황의 후손은 대대로 큰 벼슬을 했는데, 이황의 9세손이 고려 말의 이암(李·#53078;·1297~1364)이다. 이암은 초등학교 역사교과서에는 조맹부체 글씨를 잘 쓴 명필로, 중학교 역사교과서에는 원나라에서 농업 전문서적인 ‘농상집요(農桑輯要)’를 가져와 고려에 전파한 인물로 나온다.
이암은 유학을 공부한 문관이지만 무관 임무도 수행했다. 공민왕 8년(1359) 홍건적이 쳐들어오자 서북면도원수가 되어 이를 막게 됐으나 방어에 실패했다. 이암은 작은아버지가 큰스님이어서 불교 공부도 많이 했다. 그에게 영향을 준 작은아버지는 승보사찰인 전남 송광사에 모셔진 고려 16국사 가운데 13번째인 각진(覺眞) 국사다.
이암은 고래부터 전해오는 우리의 선도(仙道)사상에도 상당히 정통해, 환단고기를 구성하는 첫 번째 책인 ‘단군세기(檀君世紀)’를 썼다. 단군세기는 단군이 한 사람의 이름이 아니라, ‘왕’이나 ‘대통령’처럼 무려 47대를 내려간 직책 이름이라며 47대 단군 이름을 낱낱이 밝혀놓은 것이 특징인데, 셋째 단군인 가륵 시절 한글과 모양이 아주 흡사한 가림토 문자를 만들었다는 내용이 단군세기에 들어 있다.
한마디로 이암은 유·불·선(儒佛仙) 3교를 두루 섭렵한 인물인데 그는 유학을 근간으로 한 조선의 학맥에서는 배제되었다. 이에 대해 고성 이씨 용헌공파 종중 사무실에 근무하는 이영규씨는 이런 설명을 했다.
“이암은 일찍이 성리학을 받아들인 학자다. 그의 제자가 고려 말 삼은(三隱) 가운데 한 명인 목은 이색인데, 이색은 고려 성균관의 대사성을 지내며 훗날 조선의 이념을 세우게 되는 많은 유학자를 길러냈다. 따라서 조선의 성리학은 이암-이색의 학맥을 이었다고 봐야 한다. 그런데 임진왜란 이후 사림파가 득세하면서 조선의 유학자들은 이암과 이색을 조선 성리학 계보에서 제외했다. 그리고 조선 개국에 반대한 정몽주를 조선 유학을 이어준 인물로 선정했다.
사림파는 명분에 집착하는 정도가 강했으므로 지조를 지키기 위해 조선 개국에 반대한 정몽주를 그들의 스승으로 삼은 것이다. 조선의 사림파가 이러한 결정을 내린 데는 이암과 이색이 유학만을 하지 않은 것도 중요한 이유가 된 것 같다. 작은아버지가 스님이었던 이암과 그의 제자인 이색은 불가(佛家)에 대해서도 많은 글을 남겼다.
임진왜란 이후의 조선은 성리학 일색으로 점철된 사회였지만, 고려 말은 사상적으로 아주 분방한 사회였다. 이 때문에 이암은 전통적인 사서와 사상에도 관심을 기울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임란 이후의 조선 유학자들은 성리학 일색으로 가면서 우리의 고유 사상과 역사를 배척했다. 이암이 조선 유학의 맥에서 배제된 것과 그가 쓴 단군세기가 주목받지 못한 것은 조선 유학자들의 선택이라고 할 수 있겠다.”
유학을 공부했지만 조선을 이끈 정통 유학자 계보에서는 제외된 이암. 이것이 집안의 운명이 되면서 고성이씨 집안은 비(非)유교적인, 다시 말하면 우리 고유의 선도적인 것을 이어 나가는 계기를 잡은 것 같다. 이러한 추정은 이암의 현손(玄孫)으로 조선 연산군과 중종 때 활약한 학자인 이맥(李陌·1455~1528)의 등장으로 확인되는데, 이맥은 환단고기를 이루는 또 하나의 책인 ‘태백일사(太白逸史)’의 저자다.
북방사 위주로 정리한 이맥의 태백일사
태백일사는 삼신오제본기-환국본기-신시본기-삼한관경본기-소도경전본훈-고구려국본기-대진국본기로 구성돼 있다. 삼신오제본기(三神五帝本紀)는 우리 민족 중심의 천지창조를, 환국본기(桓國本紀)는 7대에 걸친 환인이 이끈 환국(하늘나라) 이야기를, 신시본기(神市本紀)는 환웅이 세운 배달나라 신시 역사를, 삼한관경본기(三韓管境本紀)는 단군조선과 함께 3조선을 이룬 막조선과 번조선 역사를, ‘소도경전본훈(蘇塗經典本訓)’은 천부경과 삼일신고를 담고 있고, 고구려국본기는 고구려 역사를, 대진국본기는 발해 역사를 담고 있으니, 태백일사는 환단고기에서 가장 핵심적인 책이라고 할 수 있겠다.
환웅이 이끈 신시 시대에서 고구려 사이에는 단군을 중심으로 한 고조선이 있어야 하는데 그 부분은 빠져 있다. 왜 이맥은 고조선사를 빼놓은 채 태백일사를 쓴 것일까. 이유는 고조부인 이암이 ‘단군세기’란 이름으로 단군조선의 역사를 정리해놓았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이맥은 태백일사를 통해 고조부가 정리하지 못한 단군조선 이전 역사와 단군조선 이후의 북방사를 정리했다. 이와 관련, 이유립으로부터 환단고기를 받은 전형배 사장은 약간 다른 의견을 갖고 있었다.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고조선과 삼한은 3개 국가 체제를 이루고 있다고 밝혔는데 이와 맥을 같이하는 것이 태백일사다. 세 조선 가운데 가장 중심인 조선이 단군이 이끈 ‘신조선’(만주에 위치)인데, 신조선에 대해서는 고려 말 이암이 단군세기로 정리한 바 있다. 이암은 나머지 두 개 조선인 ‘말한조선’(한반도에 위치)과 ‘번한조선’(중국 요서지역에 위치)에 대해서는 정리하지 못했다. 이맥은 고조부인 이암이 정리하지 못한 나머지 두 조선의 역사를 삼한관경본기에 정리함으로써, 세 개 조선으로 구성된 고조선사를 완성했다.”
그러나 이맥은 고구려와 함께 존재한 신라와 백제의 역사는 물론이고 발해와 동시대를 이룬 통일신라사를
태백일사에서 빠뜨렸다. 이맥은 조선이 고구려와 발해사에 주목하지 않는 것에 불만을 품고 의도적으로 누락된 역사인 북방사 위주로 역사를 밝혀놓았을 수 있다. 이맥이 이러한 선택을 한 데는 그의 집안 내력과 그가 살았던 당시의 시대 상황이 영향을 끼쳤을 수 있다.
이암은 고래부터 전해오는 우리의 선도(仙道)사상에도 상당히 정통해, 환단고기를 구성하는 첫 번째 책인 ‘단군세기(檀君世紀)’를 썼다. 단군세기는 단군이 한 사람의 이름이 아니라, ‘왕’이나 ‘대통령’처럼 무려 47대를 내려간 직책 이름이라며 47대 단군 이름을 낱낱이 밝혀놓은 것이 특징인데, 셋째 단군인 가륵 시절 한글과 모양이 아주 흡사한 가림토 문자를 만들었다는 내용이 단군세기에 들어 있다.
한마디로 이암은 유·불·선(儒佛仙) 3교를 두루 섭렵한 인물인데 그는 유학을 근간으로 한 조선의 학맥에서는 배제되었다. 이에 대해 고성 이씨 용헌공파 종중 사무실에 근무하는 이영규씨는 이런 설명을 했다.
“이암은 일찍이 성리학을 받아들인 학자다. 그의 제자가 고려 말 삼은(三隱) 가운데 한 명인 목은 이색인데, 이색은 고려 성균관의 대사성을 지내며 훗날 조선의 이념을 세우게 되는 많은 유학자를 길러냈다. 따라서 조선의 성리학은 이암-이색의 학맥을 이었다고 봐야 한다. 그런데 임진왜란 이후 사림파가 득세하면서 조선의 유학자들은 이암과 이색을 조선 성리학 계보에서 제외했다. 그리고 조선 개국에 반대한 정몽주를 조선 유학을 이어준 인물로 선정했다.
사림파는 명분에 집착하는 정도가 강했으므로 지조를 지키기 위해 조선 개국에 반대한 정몽주를 그들의 스승으로 삼은 것이다. 조선의 사림파가 이러한 결정을 내린 데는 이암과 이색이 유학만을 하지 않은 것도 중요한 이유가 된 것 같다. 작은아버지가 스님이었던 이암과 그의 제자인 이색은 불가(佛家)에 대해서도 많은 글을 남겼다.
임진왜란 이후의 조선은 성리학 일색으로 점철된 사회였지만, 고려 말은 사상적으로 아주 분방한 사회였다. 이 때문에 이암은 전통적인 사서와 사상에도 관심을 기울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임란 이후의 조선 유학자들은 성리학 일색으로 가면서 우리의 고유 사상과 역사를 배척했다. 이암이 조선 유학의 맥에서 배제된 것과 그가 쓴 단군세기가 주목받지 못한 것은 조선 유학자들의 선택이라고 할 수 있겠다.”
유학을 공부했지만 조선을 이끈 정통 유학자 계보에서는 제외된 이암. 이것이 집안의 운명이 되면서 고성이씨 집안은 비(非)유교적인, 다시 말하면 우리 고유의 선도적인 것을 이어 나가는 계기를 잡은 것 같다. 이러한 추정은 이암의 현손(玄孫)으로 조선 연산군과 중종 때 활약한 학자인 이맥(李陌·1455~1528)의 등장으로 확인되는데, 이맥은 환단고기를 이루는 또 하나의 책인 ‘태백일사(太白逸史)’의 저자다.
북방사 위주로 정리한 이맥의 태백일사
태백일사는 삼신오제본기-환국본기-신시본기-삼한관경본기-소도경전본훈-고구려국본기-대진국본기로 구성돼 있다. 삼신오제본기(三神五帝本紀)는 우리 민족 중심의 천지창조를, 환국본기(桓國本紀)는 7대에 걸친 환인이 이끈 환국(하늘나라) 이야기를, 신시본기(神市本紀)는 환웅이 세운 배달나라 신시 역사를, 삼한관경본기(三韓管境本紀)는 단군조선과 함께 3조선을 이룬 막조선과 번조선 역사를, ‘소도경전본훈(蘇塗經典本訓)’은 천부경과 삼일신고를 담고 있고, 고구려국본기는 고구려 역사를, 대진국본기는 발해 역사를 담고 있으니, 태백일사는 환단고기에서 가장 핵심적인 책이라고 할 수 있겠다.
환웅이 이끈 신시 시대에서 고구려 사이에는 단군을 중심으로 한 고조선이 있어야 하는데 그 부분은 빠져 있다. 왜 이맥은 고조선사를 빼놓은 채 태백일사를 쓴 것일까. 이유는 고조부인 이암이 ‘단군세기’란 이름으로 단군조선의 역사를 정리해놓았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이맥은 태백일사를 통해 고조부가 정리하지 못한 단군조선 이전 역사와 단군조선 이후의 북방사를 정리했다. 이와 관련, 이유립으로부터 환단고기를 받은 전형배 사장은 약간 다른 의견을 갖고 있었다.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고조선과 삼한은 3개 국가 체제를 이루고 있다고 밝혔는데 이와 맥을 같이하는 것이 태백일사다. 세 조선 가운데 가장 중심인 조선이 단군이 이끈 ‘신조선’(만주에 위치)인데, 신조선에 대해서는 고려 말 이암이 단군세기로 정리한 바 있다. 이암은 나머지 두 개 조선인 ‘말한조선’(한반도에 위치)과 ‘번한조선’(중국 요서지역에 위치)에 대해서는 정리하지 못했다. 이맥은 고조부인 이암이 정리하지 못한 나머지 두 조선의 역사를 삼한관경본기에 정리함으로써, 세 개 조선으로 구성된 고조선사를 완성했다.”
그러나 이맥은 고구려와 함께 존재한 신라와 백제의 역사는 물론이고 발해와 동시대를 이룬 통일신라사를 태백일사에서 빠뜨렸다. 이맥은 조선이 고구려와 발해사에 주목하지 않는 것에 불만을 품고 의도적으로 누락된 역사인 북방사 위주로 역사를 밝혀놓았을 수 있다. 이맥이 이러한 선택을 한 데는 그의 집안 내력과 그가 살았던 당시의 시대 상황이 영향을 끼쳤을 수 있다.
이암은 고래부터 전해오는 우리의 선도(仙道)사상에도 상당히 정통해, 환단고기를 구성하는 첫 번째 책인 ‘단군세기(檀君世紀)’를 썼다. 단군세기는 단군이 한 사람의 이름이 아니라, ‘왕’이나 ‘대통령’처럼 무려 47대를 내려간 직책 이름이라며 47대 단군 이름을 낱낱이 밝혀놓은 것이 특징인데, 셋째 단군인 가륵 시절 한글과 모양이 아주 흡사한 가림토 문자를 만들었다는 내용이 단군세기에 들어 있다.
한마디로 이암은 유·불·선(儒佛仙) 3교를 두루 섭렵한 인물인데 그는 유학을 근간으로 한 조선의 학맥에서는 배제되었다. 이에 대해 고성 이씨 용헌공파 종중 사무실에 근무하는 이영규씨는 이런 설명을 했다.
“이암은 일찍이 성리학을 받아들인 학자다. 그의 제자가 고려 말 삼은(三隱) 가운데 한 명인 목은 이색인데, 이색은 고려 성균관의 대사성을 지내며 훗날 조선의 이념을 세우게 되는 많은 유학자를 길러냈다. 따라서 조선의 성리학은 이암-이색의 학맥을 이었다고 봐야 한다. 그런데 임진왜란 이후 사림파가 득세하면서 조선의 유학자들은 이암과 이색을 조선 성리학 계보에서 제외했다. 그리고 조선 개국에 반대한 정몽주를 조선 유학을 이어준 인물로 선정했다.
사림파는 명분에 집착하는 정도가 강했으므로 지조를 지키기 위해 조선 개국에 반대한 정몽주를 그들의 스승으로 삼은 것이다. 조선의 사림파가 이러한 결정을 내린 데는 이암과 이색이 유학만을 하지 않은 것도 중요한 이유가 된 것 같다. 작은아버지가 스님이었던 이암과 그의 제자인 이색은 불가(佛家)에 대해서도 많은 글을 남겼다.
임진왜란 이후의 조선은 성리학 일색으로 점철된 사회였지만, 고려 말은 사상적으로 아주 분방한 사회였다. 이 때문에 이암은 전통적인 사서와 사상에도 관심을 기울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임란 이후의 조선 유학자들은 성리학 일색으로 가면서 우리의 고유 사상과 역사를 배척했다. 이암이 조선 유학의 맥에서 배제된 것과 그가 쓴 단군세기가 주목받지 못한 것은 조선 유학자들의 선택이라고 할 수 있겠다.”
유학을 공부했지만 조선을 이끈 정통 유학자 계보에서는 제외된 이암. 이것이 집안의 운명이 되면서 고성이씨 집안은 비(非)유교적인, 다시 말하면 우리 고유의 선도적인 것을 이어 나가는 계기를 잡은 것 같다. 이러한 추정은 이암의 현손(玄孫)으로 조선 연산군과 중종 때 활약한 학자인 이맥(李陌·1455~1528)의 등장으로 확인되는데, 이맥은 환단고기를 이루는 또 하나의 책인 ‘태백일사(太白逸史)’의 저자다.
북방사 위주로 정리한 이맥의 태백일사
태백일사는 삼신오제본기-환국본기-신시본기-삼한관경본기-소도경전본훈-고구려국본기-대진국본기로 구성돼 있다. 삼신오제본기(三神五帝本紀)는 우리 민족 중심의 천지창조를, 환국본기(桓國本紀)는 7대에 걸친 환인이 이끈 환국(하늘나라) 이야기를, 신시본기(神市本紀)는 환웅이 세운 배달나라 신시 역사를, 삼한관경본기(三韓管境本紀)는 단군조선과 함께 3조선을 이룬 막조선과 번조선 역사를, ‘소도경전본훈(蘇塗經典本訓)’은 천부경과 삼일신고를 담고 있고, 고구려국본기는 고구려 역사를, 대진국본기는 발해 역사를 담고 있으니, 태백일사는 환단고기에서 가장 핵심적인 책이라고 할 수 있겠다.
환웅이 이끈 신시 시대에서 고구려 사이에는 단군을 중심으로 한 고조선이 있어야 하는데 그 부분은 빠져 있다. 왜 이맥은 고조선사를 빼놓은 채 태백일사를 쓴 것일까. 이유는 고조부인 이암이 ‘단군세기’란 이름으로 단군조선의 역사를 정리해놓았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이맥은 태백일사를 통해 고조부가 정리하지 못한 단군조선 이전 역사와 단군조선 이후의 북방사를 정리했다. 이와 관련, 이유립으로부터 환단고기를 받은 전형배 사장은 약간 다른 의견을 갖고 있었다.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고조선과 삼한은 3개 국가 체제를 이루고 있다고 밝혔는데 이와 맥을 같이하는 것이 태백일사다. 세 조선 가운데 가장 중심인 조선이 단군이 이끈 ‘신조선’(만주에 위치)인데, 신조선에 대해서는 고려 말 이암이 단군세기로 정리한 바 있다. 이암은 나머지 두 개 조선인 ‘말한조선’(한반도에 위치)과 ‘번한조선’(중국 요서지역에 위치)에 대해서는 정리하지 못했다. 이맥은 고조부인 이암이 정리하지 못한 나머지 두 조선의 역사를 삼한관경본기에 정리함으로써, 세 개 조선으로 구성된 고조선사를 완성했다.”
그러나 이맥은 고구려와 함께 존재한 신라와 백제의 역사는 물론이고 발해와 동시대를 이룬 통일신라사를 태백일사에서 빠뜨렸다. 이맥은 조선이 고구려와 발해사에 주목하지 않는 것에 불만을 품고 의도적으로 누락된 역사인 북방사 위주로 역사를 밝혀놓았을 수 있다. 이맥이 이러한 선택을 한 데는 그의 집안 내력과 그가 살았던 당시의 시대 상황이 영향을 끼쳤을 수 있다.
(신동아 9월호 권말부록 "환단고기의 진실"중에서..옮김)
'--------- 공 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영어동화 리스트 (0) | 2009.01.12 |
---|---|
신지애는 왜 무너지지 않을까? (0) | 2008.11.28 |
원소기호 이름 (0) | 2008.09.02 |
원소의 화합 (0) | 2008.07.07 |
Top nouch (0) | 2008.03.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