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공 부

공부, 왜 해야 하나?

 

허용범 선배님의 글을 통하여 늘 자각하고 끊임없는 열정을 갖도록 하자...

국민학교, 고등학교 선배님으로써 고향의 선배님을써 자랑스럽다... 

국가와 지역을 위하여 큰 일꾼으로 더 크게 우뚝 서시길 기원드리며...

 

 

 공부 왜, 어떻게 할 것인가


 허용범:  공부에 도움을 주기 위해

 자신의 고교시절을 돌아보며 쓴 에세이 글.1)


1. 먼 훗날의 나에게 미안해하지 않기 위해


“지금 자면 꿈을 꾸지만 공부하면 꿈을 이룬다.”

“오늘 걷지 않으면 내일 뛰어야 한다.”

“꿈이 눈앞에 있다. 왜 팔을 뻗지 않는가.”

 “도전하지 않으면 성취란 없다.”

“불가능이란 노력하지 않는 자의 변명이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닐지 몰라도 성공은 성적순이다.”


- 하버드 대학 도서관의 낙서들



인생에는 계기가 있다


인생은 한 특별한 계기에 의해 방향이 정해지는 것 같다. 그 계기를 잘 활용하면 새로운 자기도약의 발판이 되기도 하고, 잘못하면 영 엉뚱한 인생을 살아 나중에야 후회하는 시발점이 되기도 한다. 인생에는 그런 특별한 계기들이 자주 찾아오지는 않지만 누구에게나 몇 번씩은 찾아온다. 고등학교 때 열심히 공부하는 것도, 남은 삶의 방향을 정하는 중요한 계기중 하나임에 틀림없다.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때였다. 아마 1학년 중간고사 어느쯤인 것으로 기억된다. 교실로 들어온 담임선생님이 상기된 얼굴로 나를 찾았다.

“야, 너 일등이다. 전국에서 일등을 했어!”


당시(1980년) 전국적으로 치러진 모의학력고사에서 일등을 했다. 담임 선생님뿐만 아니라 학교가 술렁거렸다. 우리 학교에서 전국 일등을 내다니! 그날 이후 선생님들과 친구들이 나를 보는 눈이 달라졌다는 것을 나는 몸으로 느끼게 됐다. 대우도 달라졌다. 나는 ‘공부를 잘하는 학생’으로 통했고, 선생님께 무엇을 질문해도 진지하게 받아들여졌다. 무엇보다 큰 변화는, 내가 나 자신을 보는 시선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한번 일등을 했다는 것은 대단히 특별한 동기와 기회를 내게 주었다. 마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가 평생 동안 예우를 받듯이, 나는 오랫동안 그 전국모의고사 수석의 유산을 과분하게 받았다. 나는 그날을 ‘계기’로 공부를 열심히 하게 됐다. 그냥 열심히가 아니라 ‘대단히 열심히’ 하는 학생이 되었다.


“단 한번이라도 100점을 맞아보라.”

나는 그 27년 전의 사건 이후 누군가가 ‘공부 잘하는 법’을 알려달라고 할 때마다 이렇게 말하곤 한다. 100점을 맞는 것과 99점을 맞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점수로는 1점의 차이밖에 없지만, 그 1점이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서는 100점을 목표로 해선 안된다. 100점을 맞으려면 200점을 목표로 해야하고, 완벽한 공부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 100점을 받으려는 학생과 90점 정도를 목표로 하는 학생은 공부의 질과 양, 학습태도에서 천지차이가 난다.


신문사 기자 시절 나를 특별히 아껴주신 대선배가 있었다. 그 분은 “한번 일등을 해본 사람과 못해본 사람은 다르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나와 똑같은 생각을 가졌다. 일등과 이등은 하늘과 땅만큼 노력과 결과에서 차이가 난다는 것을 그 분은 알고 계신 것이다. 금메달리스트가 위대한 이유와 같다.


다행스럽게도 공부를 열심히 한 내 노력은 좋은 점수로 나타났다. 고교 3년 동안 전교에서 일등을 많이 했다. 전국적으로 치러지는 모의학력고사에서는 몇차례 전체 10위권을 오르내렸다. 1983년 말에 친 대입학력고사 결과는 경북수석이었다.


세상에 공짜란 없듯이, 그 시절 학력고사 한 방에 모든 것을 거는 수험공부에도 공짜는 없었다. 소중한 것을 얻으려면 많은 것을 참고 포기해야 하는 법이다.



공부도 익숙해지면 가속도가 붙는다


무엇보다 견디기 힘든 것은 외로움이었다. 고등학교 수험공부가 외롭다고 하면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나는 고교 3년 내내 입시책과 싸워야 하는 것이 외롭게 느껴졌다.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시작해 고3 때까지 계속된 읍내 단칸방 자취생활의 고달픔도 어린 나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노력을 요구했다. 중학교 1학년 때는 고사리였던 손으로 새벽별을 보며 일어나 찬물에 쌀을 씻고 밥을 지어 형들의 도시락까지 싸곤 했다. 내 자취방 옆방에서 단칸 신혼살림을 하던 아주머니는 매일 안쓰러운 표정으로  “아이구… 저 어린애가 밥을 짓고 반찬을 하다니”라면서 나물채나 김치 같은 것을 먹으라고 가져다 주었다.

중3 때부터 누나가 출퇴근을 하며 밥을 지어주었고 고교 때는 결국 어머니가 나와서 내 뒷바라지를 했지만 자취생활에서 오는 많은 시간손실에 발을 동동 굴렀다.


고등학교 때는 어떤 이유인지 몰라도 매일 코피를 쏟았다. 공부가 힘들어서라기보다 체력이 떨어져서 오는 게 아닌가 여겼지만 그런 말을 할 수는 없었다. 보약 같은 것을 모르고 사신 부모님께 건강관리 어쩌고 한다는 말은 상상도 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지어주시는 따뜻한 밥을 먹고 학교에 다니는 읍내 아이들을 한없이 부러워했다.


몸이 아플 때는 연탄불 방에 혼자 이불을 뒤집어쓰고 부들부들 떨며 견디곤 했다. 마흔 중반이 된 지금도 외출할 때 집안에 불을 켜놓는 게 습관이 된 것은, 학교에서 돌아와 컴컴하고 써늘한 그 빈방에 들어가던 기분이 너무 싫었기 때문이다. 도서관에 앉아 있으면 웬지 친구들과 동떨어진 세상에 사는 듯한 자괴감이 밀려 들어왔다. 그래도 어린마음에 “이런 걸 견디지 못하면 나중 더 큰 시련을 어떻게 견딜 것이냐”고 자신을 나무라곤 했다.


다른 일들처럼, 공부도 익숙해지면 속도가 빨라진다. 어느 때가 되자 하루 15시간을 공부만 하며 버티는 내공도 길러졌다.


그때 같이 공부했던 여러 친구들이 있었다. 그중 몇 명은 도중에 젊은 시절의 낭만을 더 소중히 여기는 쪽으로 생각을 바꿨다. 문제풀이식 수험공부가 주는 허탈감을 이기기 어려운 것은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고2 때, 먹어보지도 못한 소주에 취해 쓰러지자 같이 공부하던 친구가 업고 달랬다.


돌이켜보면 내 고교생활은 그런 자신과의 싸움이었다. 넘어지려 할 때마다 도와준 친구들의 고마움도 잊을 수 없다. 어느 겨울, 눈이 펑펑 내리던 날, 친구와 나는 “왜 공부를 해야 하느냐”를 놓고 장시간 토론을 벌였다. 우리는, 온 천지가 하얗게 눈에 덮여 대낮처럼 밝아 보였던 그날 새벽, 둘이서 안동시청 앞 광장을 거닐면서 이런 좌우명을 만들었다. 그때 우리가 만든 공부의 좌우명은, 지금도 왜 내가 이 순간 최선을 다해 성실하게 살아야 하는지를 일깨워주는 좌우명처럼 갖고 있다.


“왜 지금 공부를 해야 하느냐? 먼 훗날의 나에게 미안해하지 않기 위해…”






2. 공부에도 왕도(王道)가 있다




“권투란 자기의 원을 자기 주먹으로 뚫고 나가 원 밖에 무언가를 빼앗아오고자 하는 행위다. 원 밖에는 강력한 놈들도 잔뜩 있다. 빼앗아오기는 커녕 상대방이 네 놈의 원 속으로 쳐들어와 소중한 것을 빼앗아갈 수도 있다. 게다가 당연한 일이지만 얻어맞으면 아플 것이고, 상대방을 때리는 것도 아픈 일이다. 아니 무엇보다 서로 주먹을 주고받는다는 것은 무서운 일이다. 그런데도 넌 권투를 배우고 싶으냐? 원 안에 가만히 있는 편이 편하고 좋을 텐데.”

나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배울 겁니다.”


- 가네시로 가즈키(金城一紀)의 소설 <GO> 중에서




수험생활의 원칙


공부는 일종의 몰입이다. 집중해서 2시간을 공부하는 것이, 산만하게 10시간 책상 앞에 앉아 있는 것보다 낫다. 구도승이 도를 닦는 것처럼 정법(正法) 정진(精進) 하는 것이다. 몰입하고 집중하면 눈빛부터 맑아진다.


고교생활이 ‘수험생활’ 임을 자임한 나에겐 몇가지 원칙이 있었다.


첫째. 잠과 사투를 벌이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믿었다.


4당 5락(네시간 자면 합격, 다섯시간 자면 실패)이란 말 같은 것은 애초부터 믿지 않았다. 인간은 잠을 자지 않으면 집중할 수 없도록 설계되어 있다. 잠은 편안히 충분히 자되, 깨어있는 시간에 맑은 머리로 집중하는 것이 옳다. 그것이 지금도 가장 현명한 수험공부 방법이라고 믿고 있다.


집에서 서너시간만 자고 멍한 머리로 학교에 와 졸고 피곤해 하는 학생보다 비능률적으로 공부하는 수험생은 없다. 비단 수험생만이 아니라 직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어느 일이나 쉬운 것은 없고, 특히 두뇌를 써야하는 일은 맑은 머리, 가벼운 몸으로 하지 않으면 안된다. 수세미처럼 헝클어진 머리를 흐느적거리는 육신 위에 얹어서는 능률이 오르고 일에 집중될 턱이 없다. 그런 이는 자신의 인생을 허비할 뿐이고 조직전체의 생산력을 저해하는 사람이다.


둘째. 여러 권의 참고서적을 보기보다 한 가지라도 확실하게 해야 한다.


같이 공부를 하던 친구 중에 그 반대로 하던 이가 있었다. 그는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했고 집중도도 높았다. 하지만 “어떤 책이 더 좋은지”를 찾는데 너무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 친구가 가장 좋은 교재를 찾아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분주한 시간에 나는 이미 갖고 있는 좀 후진 책으로 해야할 공부를 끝내곤 했다.


고교 공부 수준에서는 기본된 지식을 확실히 아는 것이 중요하다. 기본 지식과 원리를 알면 변형된 문제들은 마치 계단을 밟아 올라가듯히 하나씩 하나씩 해결된다. 기본적 지식을 먼저 충분히 이해하지 않고 어려운 문제지부터 잡는 식으로는 기초가 없기 때문에 지식의 축적이 이뤄질 수 없다. 살면서 닥치는 여러문제들을 해결하는 데도 마찬가지의 원리가 적용된다.


셋째. 단순한 반복암기는 의외로 중요하다.


암기라고 하면 절대 해서는 안되는 교육방법처럼 이야기하는 이들에게 동의할 수 없다. 외운다는 것만큼 확실하게 지식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방법은 없다. 영어공부의 왕도(王道)도 많은 문장을 통째로 암기하는 것이다.


논술의 중요성이 높아진 요즘에도 역시 암기는 수험생의 절대 미덕이다. 에세이(논술)를 봐도, 숫자와 사례가 들어있는 글의 설득력은 그렇지 않은 경우와 비교할 수 없는 힘을 갖는다. 아무리 전체적 이해력과 창의력이 중요하다해도 숫자와 사례는 의도적으로 외우지 않으면 기억할 수 없다. ‘이해할 수 없거든 외워라’ 이 명제를 수험생이라면 잊어버려선 안된다. 옛 선비들은 공맹(孔孟)의 말씀을 이해하기보다 먼저 외웠다. 세월이 지나고 나이를 먹으면서 공맹의 말씀을 점점 이해해 나갔다.



마지막 한가지 더. 끝까지 자기힘으로 풀어보는 습관을 가져야 한다.


수학이 특히 그렇다. 어렵게 어렵게, 답을 보지 않고 혼자 힘으로 문제를 풀어보면 오래 기억에 남고 창의적인 방법을 체득하게 만들어준다.


당시에 유행했던 수학정석 참고서에는 정말 고난도의 문제들이 많았다. 일본 본고사 시험문제라느니, 과거 서울대 본고사 문제라느니 하는 것들이다. 한두 개를 내 힘으로 풀고나면 어떤 과제도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생겼다. 그 과정에서 앞에 배운 것들을 수없이 다시 뒤적이고 궁리해야 했다. 내가 알았다고 생각된 것이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곤 했다.



수험공부는 자기 단련의 과정


3년간 나를 몰입시켰던 고교시절의 수험공부는 천천히 나를 단련시켰다. 공부의 과정은 끈기와 인내심을 길러주었고 일에 집중하는 방법을 체득케 했다. 힘든 과제를 혼자 힘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생각과 노력이 필요한지도 그 과정에서 배웠다.


대학을 졸업하고 군에 가서, 또 제대 후 기자생활을 시작하면서 막막하기만 한 과제들을 수시로 맡았다. 그 때마다 고교 때 수험공부 하던 식으로, 어려운 수학문제를 내 힘으로 풀어가던 방법대로 결과에 접근해갔다.


공부도, 업무도, 대부분의 일은 마치 돌맹이로 탑을 쌓는 것과 같다. 서두르지 않고, 전체적 구도를 늘 염두에 두면서 꾸준히 해야한다. 한칼에, 한방에, 저절로 이뤄지는 것은 이 세상에 없다. 고민과 생각만으로도 아무 것을 이룰 수 없다. 하나씩 하나씩, 끈기있게 그러나 현명하게, 돌을 쌓지 않으면, 높은 돌탑은 만들어지지 않는다.


한 가지 첨언. 당시의 고교공부는 오로지 수험만을 위한 암기위주의 학습이라는 비판은 옳다. 그런 식의 교육은 반드시 고쳐져야 하고, 미국처럼 창의적 응용능력 함양을 중시하는 쪽으로 바뀌어야만 한다.


그렇다고 그 당시의 고교교육이 무의미했고, 그때의 공부란 그저 머리좋은 아이들의 암기력 싸움이라고 하는 데는 동의할 수 없다. 그때 공부를 잘했던 아이들은 조선시대 서당에서도 열심히 공부했을 것이다. 미국에서도, 프랑스에서도, 한국에서도, 그 경쟁의 원리는 어느 시대, 어느 곳이나 똑같다. 어느 곳에서나 최선을 다하는 사람은 영혼을 던져 몰입하는 사람이다.


특히 청소년 시절 학교공부는 시험기술만을 배우는 게 아니다. 평생 동안 계속될, 삶의 튼튼한 밑바탕을 만드는 자기수련의 과정이다.



3. 영어로 무장하고 세계로 나가자




Again, you can't connect the dots looking forward; you can only connect them looking backwards. So you have to trust that the dots will somehow connect in your future. You have to trust in something - your gut, destiny, life, karma, whatever. This  approach has never let me down, and it has made all the difference in my life.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미래를 내다보면서 점을 이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오직 과거를 돌이켜 보면서 점을 이을 수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그 점들이 여러분의 미래에 어떻게든 서로 연결될 것이라는 믿음을 가져야만 합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것에- 자신의 내면, 운명, 인생, 업보, 그 무엇이든지 신념을 가져야 합니다. 이런 접근방법은 결코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고 내 인생에 의미있는 것들을 만든 힘이었다.


- 스티브 잡스 2005년 6월 12일 스탠포드대 졸업식 축사 "여러분이 사랑하는 것을 찾아야 합니다" (You've got to find what you love) 중에서



자기가 말하는 만큼만 안다


옛날 부모들은 소를 팔아 자식들을 대학에 보내 상아탑(象牙塔) 대신 우골탑(牛骨塔)을 쌓았다. 요즘 부모들은 자식에게 영어를 가르치기 위해 집을 팔아 외국에 내보낸다. 집 기둥뿌리가 뽑히니 다른 의미의 우골탑(宇骨塔)이다.


특파원으로 있던 워싱턴 근처에는 자식을 데리고 온 기러기 엄마들이 부지기수였다. 영어 하나 배우겠다고 부부끼리, 부자끼리 생이별도 마다않는 그 사람들의 이야기는 눈물 없이 들을 수 없다. 그 자체가 학문도 아닌 영어라는 외국말 하나 배워오라고 한해에 몇 만 달러를 쓰는 것이다. 우리 부모세대에게 영어는 하나의 한(恨)처럼 맺혀있다.


개인들의 절절한 한은 그렇다고 하더라도, 국가적 차원에서의 낭비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한 해에 조기 유학생만 2, 3만 명에 이른다. 이들 한 사람이 한 해 쓰는 돈이 4, 5만 달러씩 (약 4000~5000 만원). 1만 명이면 5억 달러다. 그렇다고 영어 공부를 안 할 수도 없다.


국경 없는 이 세계에 소위 글로벌 언어인 영어를 쓰지 않고서는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하게 됐다. 영어를 잘 모르고서는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도 없다. 인터넷으로 얻는 정보의 대부분은 영어로 되어 있다. 한 통계에 따르면 인터넷 상 중요 정보의 80%는 영어로 기술되어 있다. 영어 사대주의(事大主義)가 아니라 실용적인 관점에서 영어는 필수가 된 것이다. 21세기 이후의 시대에 영어는 국제운전면허와 다름없다. 세계 어디를 가도 영어를 제대로 쓰지 못하면 활동이 불가능하다.


대한제국 구한말의 외무대신이었던 이하영(李夏榮)의 전직은 상점 점원, 요리사였다. 그를 신분의 한계를 뛰어넘게 만든 발판은 ‘짧은 영어실력’이었다. 외국인 선교사와의 우연한 만남으로 ‘조선에서 영어 할 줄 아는 유일한 인물’이 된 그는 황제의 밀명을 받아 워싱턴 사교계에 진출하고, 외무대신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일제의 우리나라 침탈과정에서 일어난 그의 역할과 공과(功過)를 떠나서 본다면, 영어는 그를 출세시킨 결정적 힘이었다.


우리나라에서 빼어난 고급영어를 잘 구사하기로 유명한 한 전직 외교관은 “내가 젊었을 때 지금처럼 영어를 잘 했더라면 내 인생이 달라졌을 것”이라고 말해준 적이 있다. 70세가 넘은 그는 젊었을 때도 영어를 잘하기로 유명했다는데, 그런 사람마저 영어에 회한을 갖고 있다.


정치부 기자생활을 할 때 국회의원들이 외국 국제회의 참석차 나갔다 오면 꼭 하는 말이 있었다. “영어를 배워야겠다는 결심을 하루에도 수십번 씩 하게 되더라”는 것이다. 국제회의에 국회의원이라고 참석했는데, 영어를 제대로 못하니 리셉션이든 어디든 꿀 먹은 벙어리가 될 수밖에 없다. 다른 나라 참석자들은 국적을 가리지 않고 자기네들끼리 삼삼오오 모여 떠들고 토론하는데, 우리나라 국회의원들은 영어를 못하니 맨 날 우리끼리 모여 있을 뿐이다. “정말 비참한 생각이 들더라”고 한 이가 한둘이 아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영어의 문을 무사히 통과할 수 있을까?

내 경험에 비춰보면, 영어를 배우는 첩경은 무조건 영어에 대한 노출빈도를 늘리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영어를 쓰는 기회를 늘리는 것이다. 외국 사람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2, 3년 살면 한국말을 유창하게 하고, 심지어 방송에 나가 토크쇼에 참석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는 사람들이 많다. 우리는 10년 이상 영어를 배워도 입을 떼지 못하는데 말이다.


결국 그 사람들은 한국말을 문법으로 배우지 않고 실생활로 배우기 때문에 일어나는 차이다. 또 실용적 사고와 생활방식이 몸에 배인 서구인들은 한국 사람들에게 한국말로 대화를 해 보는데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다. 그런 후안무치한 배짱으로 영어를 자꾸 써봐야 영어가 는다. 부끄러워하고 실수할까봐 겁낸다면 죽어도 영어를 배울 수 없다. 지금 아무리 영어를 잘하는 사람도 따지고 보면 결국 ABC부터 배웠다, 그렇게 여기고 배짱 좋게 나가야 한다.


이런 점에서 우리나라의 정통 영어교육방식은 정말 바뀌어야 한다. 영어를 정통문법에 매달려 배우게 하는 교육방법을 바꾸지 않으면 늘 영어후진국을 벗어나지 못한다. 하버드에 다닐 때 문법에 맞지 않는 영어를 하는 외국출신 학생들을 숱하게 봤다. 특히 스페인어권 출신들이 그랬다. 그들은 거의 완벽한 구어(口語)위주의 영어를 구사하고, 문법 같은 것은 아예 배우지도 않는 것 같았다. 3인칭 단수 뒤에 S를 붙이거나 말거나 그들은 신경도 쓰지 않는다. 하지만 스페인어권 출신들만큼 말을 많이 하는 사람들도 없다. 쉴 새 없이 떠들고 빠르게 말한다. 그런 영어도 몇 달이 지나면 정말 달라져 있다는 것을 보고 놀랐다.


이젠 ‘글로비쉬’라고 해서 실생활 위주로 쓰는 영어가 많이 유통되고 있다. 영어를 쓰는 사람이 원어민보다 비원어민이 많아지면서 정통문법에 구애받지 않는 ‘글로벌 잉글리쉬’ 즉 ‘글로비쉬’(Global+English)의 시대가 온 것이다. 글을 쓸 때는 다르지만 대화에서는 아무 문제가 안된다.


자꾸 글로 써보는 게 최고


영어공부의 격언 중에 “자기가 말하지 못하는 것은 듣지 못한다”는 말이 있다. 자기가 직접 말을 해봐야 그 뜻을 알고 잘 잊어먹지 않는다는 것은 체험적으로도 맞는 말 같다. 눈으로 보고 읽는 것은 잘하지만 말을 못하는 것은 그 영어를 써먹어 보지 않아서이다. 만일 직접 미국인과 대화할 기회가 없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자꾸 글로 써봐야 한다. 글로 써보는 것은 정확한 영어를 배우는 지름길이다.


워싱턴에 있는 동안 미국 학교에 다닌 아이가 영어를 배우는 방식과 속도를 유심히 관찰했다. 아이가 짧은 기간에 영어를 배운 가장 큰 힘은 역시 매일매일 선생님이 내준 에세이 과제물 덕분인 것 같다. 미국 학교의 선생님들은 초등학교 저학년에게도 몇 줄은 안되지만 반드시 독후감이나 어떤 조사 과제물을 종이에 써오도록 시켰다. 인터넷 등에서 베끼는 것이 아니라 서툴더라도 반드시 자기 생각을 써야한다.


처음엔 문장도 안되고 형식도 엉망이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깔끔해지고 작성속도가 빨라졌다. 선생님은 아이의 서툰 영어에세이를 빨간 사인펜이나 볼펜으로 일일이 고쳐 되돌려주었다. 참으로 놀라운 정성이었다. 2, 3년이 지나자 아이는 스스로 글을 구성하는 능력이 길러졌고, 자기의 생각을 창의적으로 전개시키는 방법을 체득해 갔다. 미국의 선생님이 위대해서가 아니라 미국식 교육의 힘이다.


어휘력도 대단히 중요하다. 500 단어나 1000 단어 정도를 알면 슈퍼나 시장에서 물건을 사는 데는 불편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영어로는 학교에서 공부할 수가 없고 비지니스 사회에서도 통하지 않는다. 한국 사람들이 미국에서 하는 농담 중에, “어, 미국에서는 거지도 영어를 잘 하네”라는 게 있다. 그러나 영어를 배운다는 것은 길거리 무전취식자들이나 집없는 사람들의 영어를 배우자는 게 아니다. 강의를 듣고 책을 읽고 토론을 하려면 신문을 읽을 수 있을 만큼의 어휘력은 반드시 있어야 한다. 영어 소설책에 재미를 들이거나 영어단어를 무조건 외우는 것도 효율적인 방법이다.


글로벌 시대는 외국어 경쟁력이 강한 나라가 선진국이 되고 없는 나라는 후진국이 되는 시대다. 강국에 둘러싸인 나라 중 복수언어 정책을 잘 한 나라는 모두 이웃나라를 크게 앞서는 선진국이 됐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4대 강국(미, 일, 중, 러)에 둘러싸여 살아가는 나라는 한국뿐이다. 글로벌 경쟁력의 원천이 외국어에서 나오는 시대. 한국의 수없이 많은 10대, 20대의 인재들에게 외국어라는 날개를 달아줘야 한다 말에 공감한다.


어제 영어사용 인구는 전세계적으로 15억명에 이른다. 좋든 싫든, 21세기에 영어를 피해갈 방법은 없다.


4. 나의 영어공부 고군분투기




“The road to achievement runs only through hardship.”

- http://en.wikipedia.org/wiki/No_pain_no_gain



영어사전 무작정 외우기


우리는 모두 문법부터 배우는 한국식 영어교육의 피해자다. 돌이켜보면 우리나라 교육당국에 소송이라도 제기하고 싶은 심정이 들때가 있다. 중학교에 들어가서 알파벳이란 걸 배우고 난 뒤 처음 선생님이 가르쳐준 것 또한 문법이었다. 지금도 문법책 제일 첫머리에 나오는 ‘To 부정사’ 용법. “다음 중 To 부정사의 용법이 다른 것은?” 답은 4번. 그런 식으로 영어를 시작했다.


그러나 어떻든 영어를 배워야만 한다면 현명한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 피해갈 도리가 없다면 돌파해야 한다. 다른 어떤 분야와 마찬가지로 영어도 자신감을 갖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 같다. “영어야 놀자”는 마음이 되면 영어공부는 거의 다 한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중학교 1학년 여름방학 때였다. 학교에서 자취방으로 돌아오는 길에 시립도서관이 있었다. 어느 날 그곳에 사전 하나를 사서 들어갔다. 서점에서 파는 ‘중학생용 영어소사전’이었다. 그 사전을 들고 앉아 보름만에 첫 페이지부터 다 외워버렸다. 염소가 종이 뜯어먹듯 사전을 삼켜버린 것이다. 옳은 방법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우직한 정면돌파 식이 때론 통하는 법이다.


중학생용 소사전 수록 단어는 채 1000단어가 안 되었다. 하지만 여름방학이 지나자 나는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교과서에 나오는 단어는 모두 알게 된 것이다. 더 이상 영어가 낯설지 않았고, 주변에서 나를 다시 보기 시작했다. 자신감이 붙었다. 일단 교과서 어느 페이지를 열어도 단어가 낯설지 않고 뜻을 아니 그럭저럭 해석도 되고 영어시간에 재미가 붙었다.


기본적인 단어가 베이스로 마련되자 더 하고 싶은 의욕이 생겼다. 당시 영어를 처음 배우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보았다는 빨간색 표지의 ‘삼위일체’ 문법책을 샀다. 아주 간결하면서도 알기 쉽게 된 그 책을 떼고 나니 중학교 수준의 문법은 금방 넘어섰다. 고등학교에 들어가서는 역시 남들이 다 하듯이 ‘성문기본영어’를 샀다. ‘삼위일체’와 별로 다를 바 없는 순 문법책이었지만 단어수준이 높았다.


고교 1학년 겨울방학 때는 ‘성문종합영어’를 사서 도서관에 앉아 하루 몇페이지씩을 넘겼다. 이어 그때만해도 가장 수준이 높다는 ‘영어의 왕도’라는 책을 들여다보았다. 그것으로 고등학교 수준의 문법공부는 끝이었다. 상당한 어휘력이 쌓였음은 물론이다. 다만, 살아있는 영어를 그때까지도 단한번도 접해본 적이 없다는 게 문제였다.


안동에 ‘스쿨 서점’이라는 유명한 책방이 있었다. 참고서를 사거나, 손바닥에 잡히는 작은 문고판 소설책을 고르러 갈 때 자주 들렀던 곳이다. 고교 1학년 말이 되자 그 서점에서 영어신문을 사게 됐다. 스쿨서점 점원 아저씨는 1학년 꼬맹이가 와서 영자신문을 들추는 것을 무척 기특하게 여긴 모양이다.


그 점원 아저씨는 표지가 뜯겨나간 지난호 뉴스위크를 공짜로 건네주시곤 했다. 얇고 부드러우며 매끌매끌한 종이에서 풍겨나오는 야릇한 잉크냄세가 너무 좋았다. 한국에 대해 나쁜 기사가 실리면 먹물로 지우거나 표지를 뜯는 보도 관제가 행해지던 시절이었다. 그걸 가방에 넣고 다니며 읽었다.


대학은 영어공부에 관한한 재앙이었다. 1학년 때 영어실습 시간이 있어서, 칸막이 된 방에 들어가 녹음기로 틀어주는 영어회화를 듣고 따라하는 시간이었다. 일주일에 한두번 하는 그걸로 영어가 늘지는 않았다. 영어 원서를 간간히 읽었지만 체계적으로 배울 기회도 없었다. 명색이 한국 최고대학이라는 서울대는 그런 커리큘럼을 갖고 있지도 않았다. 신문사에서도 미국 사람들을 접할 기회는 별로 없었다. 사회부, 정치부 기자를 한 탓이다.



누구나 알파벳부터 배운다


그런 세월동안 내 마음 한 구석에는 영어를 제대로 배워야겠다는 마음이 숙제처럼 있었다. 책을 읽는 것이 그리 어렵지는 않았지만 미국인과 대화를 해볼 기회가 없었다. 그러던 중 기회가 찾아왔다. 입사한 지 8년째 되던 1997년에 월간조선부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촌각을 다투니 일간지의 세계에서 벗어나니 여유가 생겼다.


“지금 아니면 평생 영어 공부를 못한다.”

단단히 결심을 하고 새벽 5시에 일어나 영어학원에 다니는 생활을 시작했다. 단기간에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과외 받듯 일대일 학습을 했다. 미국 버클리대를 갖 졸업한 젊은 여강사가 내 선생이었다. 투자 없이 얻는 것도 없다는 진리는 이미 그때 알고 있었다. 독선생 영어강습료로 월급의 4분의 1을 털어 넣었다. 밤늦게 술에 취해 들어온 다음날에는 이불 밖이 천리 길이었다. 서너 시간밖에 못자고 학원으로 기어나가는 날이 비일비재했다. 그래도 다녔다. 이 고통을 견디지 못하면 영어 공부의 기회를 영원히 놓칠 것 같았다. 그렇게 2년 동안, 난생 처음으로 미국 사람과 얼굴을 맞대고 매일 새벽 영어로 말하는 기회를 스스로 만들었다.


패트리샤 이거(Patricia Eger)라는 이름의 이 여강사는 나중 워싱턴 특파원 시절에도 종종 연락을 나눌 만큼 친한 친구가 되었다. 그는 정성을 들여 나를 대했다. 내가 매일 써가는 1-2페이지의 짧은 글을 갖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공부의 전부였지만, 영어가 늘어나고 있다는 걸 스스로 느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자신감이 생겼다. 여강사의 친구들과 고궁에 놀러가고 같이 밥을 먹으며 내 영어가 실제로 통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어느날엔가 신문사 후배와 비원(秘苑)에 산책을 갔다가 그 곳에서 호주인 관광객과 어울리게 됐다. 후배는 깜짝 놀랐다. 내가 그 호주인 관광객들에게 영어로 안내를 하는 것을 본 것이다. 후배는 “형처럼 영어 잘하는 사람 첨봤다”고 칭찬을 하면서 언제 영어를 배웠는지 캐묻기 시작했다.


나는 이때 배운 영어를 자산으로 하버드대 케네디스쿨(정치행정대학원)에 입학해 석사학위를 마쳤고, 워싱턴 특파원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고통스런 새벽반 영어공부 과정이 없었더라면, 하버드도, 특파원도, 나에겐 기회로 다가오지 않았을 것이다. 성취로 가는 길은 반드시 고난을 통과하게 되어 있다.


돌이켜 보면 내가 영어를 공부하게 된 첫걸음은 중학교 1학년때 그 영어사전 외우기에서 시작된 것 같다. 그리고 기자를 하면서 월급의 4분의 1을 털어넣어 새벽반 공부를 한 것이 다행이었다.



중국의 대문호 왕멍(王蒙)은 마흔 여섯 살에 영어를 처음 배우기 시작했다고 한다. 샌프란시스코 공항에서 길을 잃은 그는 아무리 헤매 다녀도 아이오와행 비행기를 타는 길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가 영어를 배우겠다고 결심한 것은 그때부터였다.


당시 그의 영어실력은 알파벳 26자와 ‘Good bye’ ‘Thank you’ 정도였다. 왕멍은 하루에 영어 단어를 30개씩 암기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천천히 꾸준하게 영어를 익혔다. “둔한 새가 먼저 난다”는 중국 속담이 있다. 영어 공부를 잘 하기 위한 환경도 중요하다. 그러나 환경 탓만 하면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한다. 내게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 그런 노력이 여러 번의 날갯짓 끝에 새를 날아오르게 하는 동력이 된다.


영어를 배워야 한다면, 지금도 늦지 않았다.





5. 글로벌 경쟁의 출발점-하버드 졸업식




“경쟁이란 단순히 경주에서 상대를 이기는 걸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경쟁의 진정한 의미는 내가 누구인가를 발견하라는 것이다. 내 가슴과 영혼이 원하는 일을 하라는 것이다. 내 안에 있는 최고의 나와 만나라는 것이다. 더 행복해지고 풍성해지라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가진 최상의 것을 세상에 내놓으라는 것이다.”


- ‘250℃ 최고의 나를 만나라’중에서



기를 꺾어놓는 도서관 규모


2000년, 공부하기엔 늦은 나이에 짐을 싸 유학을 떠났다. 1년여의 준비를 거쳐 세계 최고의 대학이라는 하버드대 입학에 성공했다. 미국 최초의 공립대학(1636년 창립)이자 세계 최고의 대학인 하버드는 많은 것으로 ‘아시아 촌놈’을 놀라게 했다. 80년대 최루탄과 운동권 구호 속에서 대학을 보내고 나이 40이 다 돼 공부를 하겠다고 바다를 건너온 만학도(晩學徒)에겐 부러움의 찬사가 절로 나오는 곳이었다. “이런 곳에서 이렇게 공부한 학생들과 경쟁하는 시대가 되었다”는 실감이 일년 내내 들었다.


300년이 넘은 벽돌건물 속에 장치된 최첨단의 교육기자재(컴퓨터 프리젠테이션 시설 같은 것)는 기부금만 350억 달러(약 35조원)를 갖고 있는 ‘세계 최고 부자대학’ 하버드의 명성을 실감나게 만들었다. 대학도서관은 가는 곳마다 사람의 기를 꺾었다. 세계 최대의 장서규모(1500만권)를 가진 하버드 도서관은 ‘하버드 라이브러리 시스템’이라는 용어를 만들어낼 만큼 정교하게 연결돼 있다. 학교 곳곳에 산재한 도서관 수만 총 90여개. 그곳을 학생이라면 어느 곳이든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다. 어디를 가든 다른 도서관에 무슨 책이 있는지 알 수 있는 것은 기본. 책을 빌리고 열람실을 이용하는 시스템은 학생이라면 누구나 가장 편안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완벽하게 컴퓨터화 되어 있다.


한번은 레포트를 쓰려고 중앙도서관 격인 와이드너 도서관 지하서고에 들어갔다가 넋을 잃고 책 구경으로 시간을 보낸 적이 있었다. 수백 년은 넘었을 듯한 가죽장정의 고전 원본들이 서가에 즐비하게 꽂혀있었다. 낡아 으스러질 것 같은 책들을 마음껏 빼서 ‘구경’했다.


1912년 처녀항해 때 침몰한 타이태닉호에 해리 엘킨스 와이드너(Harry Elkins Widener)라는 하버드 졸업생이 타고 있었다. 그는 책 수집이 취미였는데 영국에서 출발한 그 배를 탔다가 다른 1500여명의 승객과 함께 수장됐다. 그 아들의 죽음을 기려 그 어머니가 내놓은 기부금(당시 돈으로 350만 달러)으로 지어진 와이드너 도서관은 100년이 다 된 우람하고 고풍스런 석조건물이지만 그 속은 최첨단 컴퓨터 시스템으로 작동하고 있다. 출입에 필요한 것은 학생증 단 한 장. 이 도서관은 하버드의 상징처럼 돼 모든 관광객들은 그 앞에서 사진을 찍는다.


와이드너 도서관 앞에는 ‘야드’라고 불리는 교정이 있다. 수백년 된 아름드리 나무들이 우거진 이곳이 바로 영화 ‘러브 스토리’의 배경이 된 곳이다. 고목과 고건물들이 둘러싼 이 곳은 하버드생으로 전쟁에 나가 숨진 학생들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학교교회(메모리얼 처치)의 앞마당이기도 하다. 그 전사자의 교회 앞에서 매년 6월 졸업식이 열린다.


나는 2001년 6월 7일에 석사 가운을 입고 졸업식에 참석했다. 전 세계에서 온 학생들이 자녀의 졸업식을 보기 위해 온 부모들의 축하를 받는속에 졸업식이 거행됐다. 식은 아직도 전통을 이어받아 라틴어로 진행된다. 축제이면서도 엄숙한 분위기의 이 졸업식을 하버드 대학에서는 ‘졸업식’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졸업식날은 커멘스먼트 데이(Commencement Day), 즉 ‘출발일’이라는 뜻이다. 졸업은 학업의 종료가 아니라 새로운 삶의 시작임을 알리는 것이다.


경쟁을 피하지 않는 하버드생들


미국 대학생들에게 졸업은 진정한 경쟁의 출발점이다. 졸업 이후부터 삶의 경쟁이 시작되고, 누구도 그 경쟁이 어렵지만 부정하지 않는다. 자유경쟁사회인 미국에서 사람들은 어릴 때부터 경쟁이 도전해 이겨야할 대상이지 피하고 부정할 것으로 배우지 않는다. 대신 경쟁의 룰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가장 나쁜 인간으로 낙인 찍힌다. 하다못해 아이들의 축구게임에서도 가장 먼저 배우는 것이 룰이고 심판의 말을 복종하는 것이다. 반칙을 하거나 심판의 말에 복종하지 않으면 그는 그 축구서클에서 추방된다.


미국에 과연 공정한 경쟁의 룰이 살아있느냐는 논의를 한다면 전혀 다른 이야기가 진행될 것이다. 하지만 인간사회의 경쟁을 인정하고 그 결과를 받아들이는 곳에선 경쟁을 통한 서열이 자연스럽고 승자는 떳떳해 한다. 부정과 반칙이 횡행하는 사회에서는 승자가 되어도 떳떳해하지 못하고 패자는 서열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우리 사회도 점점 경쟁화되고 있다. 아니 처음부터 경쟁은 인류사회에서 존재했고 갈수록 치열해질 뿐일지 모른다. 좋든 싫든 우리의 경쟁은 이제 자기가 사는 작은 집단에서가 아니라 전 세계를 상대로 이뤄지는 시대가 됐다. 한국에서 공부한 학생도 궁극적로는 미국의 학생, 하버드 학생과 경쟁해야 한다. 이 글로벌 경쟁에서 지면 패자가 된다. 하버드 학생들이 바로 우리의 경쟁자인 셈이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누구나 경쟁의 기회를 갖도록 제도를 만들고 경쟁력을 키워야 한다. 국가는 경쟁의 가치를 가르치고 공정한 경쟁이 이뤄지도록 룰을 만들고 감독관 역할을 해야 한다. 가난한 학생들도 열심히 공부하고 능력을 쌓으면 좋은 대학에 들어가 경쟁에서 이길 수 있는 기회를 갖도록 해줘야 한다. 국가는 처음부터 경쟁을 할 수 없는 사람들(예컨대 장애인)은 보살펴야 한다. 또한, 경쟁에서 패한 사람도 다시 노력해 도전할 수 있도록 기회를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국가가 해야할 일이고 함께 살아가는 따뜻한 공동체다.


우리가 하지 말아야 할 것은 무엇인가. 경쟁 그 자체가 너무 비정(非情)하니 없애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완벽한 사회라 하더라도 경쟁이 없을 수 없다. 대학서열화를 막겠다고 서울대학교를 없애자는 사람들은 공산주의식 기계적 평등주의자일뿐이다. 이제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도 하지 않는 일이다. 중국은 가장 경쟁이 치열한 나라가 되어가고 있다.


그것이 완전개방, 완전자유 경쟁의 신자유주의 시대다. 피도 눈물도 없는 승자독식의 정글자본주의라고 비난해도 좋다. 문을 닫아걸고 혼자 독야청청해도 누구도 뭐라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나라와 사람은 패자의 쓸쓸한 길을 걸어갈 자신이 있어야 한다.


글로벌 경쟁에서는 이기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다. 그런 시대, 우리의 라이벌은 누구인가? 서울대생이고, 하버드생이고, 전 세계가 우리의 라이벌이다. 국경도 언어도 이념도 의미없는 세상이 지금 광속도로 밀어닥치고 있다.


달아나기 보다는 열린 세상으로 당당히 나아가야 한다. 피할 수 없다면 도전해서 이겨야 한다. 그것이 21세기의 삶이고 현실이다.


 

'--------- 공 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top notch(1월15일 3회)  (0) 2008.01.15
영어(자주쓰는 표현)  (0) 2007.12.22
[스크랩] 주기율표  (0) 2007.07.14
인체에 영향을 미치는 가스  (0) 2007.07.02
타이거우즈  (0) 2007.06.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