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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 랑

[스크랩] 이별 후





사랑에 맹목이 있었다면 이별에도 맹목이 있고, 
사랑에 목적지가 있었다면 이별에도 목적지가 있다. 
목적지가 있었던 사랑은 이별 후에 같은 값의 다른 모양을 지닌 목적지로 행한다.
그러나 맹목적인 사랑이었다면
이별 후에 자신이 처할 곳을 몰라서 하염없는 방황을 하고야 목적지로 발길을 돌린다

이별 후의 목적지는 집으로 가는 길이다. 
언제나처럼 집으로 가는 길이지만,전혀 다른 길을 가는 것이다.
둘의 머리 위에 함께 둘러 있던 빛들이 사라지고, 
그래그래, 하면서 둘의 사랑에게 끄덕여주는 것처럼 여겨졌던 
고개 숙인 가로등도, 풀이 죽어 고개를 수그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게 돌아간 집 속에는 기다리던 사물들이 있고, 
사무치는 사연들을 안에 품고 있다. 
그 집 속에 몸을 넣어두고 몸을 눕힌다.
관속에 눕듯이. 집이 관이 될 수 있는 지점. 그곳에 도착하게 된다. 

이별 후에 나는 비로소 당신을 정복할 수가 있다. 
방생함으로써 당신을 영원한 식민지로 만들 수 있다. 
나에게 사랑했고 이별했다는 용기가 있었으니, 
방생함으로써 당신을 지배할 수 있게 된다. 
내 마음 속에서 당신은 유영한다. 
보다 넓은 바다를 향해 헤엄치고 있는 듯한 당신의 몸짓은 
그러나 내 마음 속 어항의 이쪽 끝과 저쪽 끝을 왔다 갔다 하는 물고기에 불과하다. 

곁에 두고서 당신을 방생하겠노라 흉내내곤 하는 우리는,
새장 속에 갇힌 새를 바라보며 그의 노래를 즐기는 잔혹함을 행하는 셈이다.
새는 노래하기 위해서 태어나지 않았다.
날기 위해서 태어난 그 날개를 퍼득거리지 못하게 한다.
새장 문을 열고 넣어주는 항생제와 먹이를 얌전하게 받아먹기만을 요구한다.
새는 언제고 문이 활짝 열리면 날아갈 것이다.
문 한 번 열어줄 때마다 느끼는 조심스러움과 불안함. 
창공 전체가 새장이고, 세상의 모든 나뭇가지들이 둥지이며, 
세상의 모든 꼬물거리는 것들이 먹이라는 마음의 확장. 마음이 변해서가 아니라,
마음의 확장 때문에 가능한 이별. 그때 우리는 창공과 숲속으로 돌아간
새들이 저희들끼리 화답하는 진짜 노래를 듣게 된다. 

물리적인 역학계에서는 두 가지 힘이 존재한다. 
하나는 벡터(Vector)량이고, 하나는 스칼라(Scalar)량이다. 
벡터량은 크기와 방향을 가지고 있는 힘이다. 
그리고, 스칼라량은 크기만 존재하고 방향이 존재하지 않는 힘이다.
벡터량은 물리적인 힘이라면, 스칼라량은 마음에 존재하는 힘이다.
사랑은 사랑의 국면에서 무수하고 자잘한 물리적인 행사를 해낸다. 
그러므로, 힘의 크기와 방향이 함께 존재한다. 
사랑한다는 힘이 사랑하는 대상이라는 방향을 설정해 놓고 그곳으로 향한다.
힘이 방향을 알고 그곳으로 날아갈 때에 힘의 존재감이 존재를 반응하게 하고 
화학 작용을 일으키게 한다. 
그렇지만, 이별의 국면에서는 아무 것도 할 것이 없다. 
힘은 존재하고 방향은 존재하지 않은 상태이다. 

현존하는 힘이 부재하는 방향성 때문에 아무 곳에나 날아가기도 하고
아무런 곳으로 날아가지 못하기도 하고,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날아가기도 하고, 
이미 떠나버린 당신에게 날아가기도 한다.
그렇지만, 모든 것은 가구가 없는 큰 방에서의 소리처럼 공허하게 울려 퍼진다
방향이 소실되었지만, 아직도 남아있는 힘은 공황을 만든다
어떤 소리나 울림도 없다. 

사랑의 순간에는 생의 하중을 가볍게 하며 
생을 상쾌하게 지나갈 수 있게 했다면, 
이별 이후, 생의 하중을 있는 그대로 다 견뎌내야 한다.

이별한 후, 존재는 어디에도 있게 되고, 아무 데도 없게 된다.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이별 후에도, 
목숨을 버리고 싶은 이별 후에도,
우리는 살겠노라 호흡을 하고, 
밥을 먹고, 사람을 만나고, 일을 한다.
웃기면 웃고, 가려우면 긁고, 다리가 저리면 고쳐 앉는다.
그 속에서 그럴듯한 망각을 몸소 실천하는 듯하지만,
망각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마음의 가역 작용은 불완전하다. 
언제나 흔적이 남는다. 통증과 환희, 
쾌감과 분노 따위가 느껴지지 않을 뿐, 즉, 
그 자리가 상처가 아닐 뿐, 흉터로서 남는다. 
사랑하는 동안 급하게 흘러갔던 시간이
한없이 느리게 흘러가는 것을 무능하게 바라보면서, 
시간의 완급을 수십 번 되풀이하여 바라보면서
흉터가 비로소 흔적으로 남는다. 

그것을 우리는 망각이라고 말한다.

김소연님의 마음사전중에서....

출처 : 빈 마음이 주는 행복
글쓴이 : 양배추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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