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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 동

[스크랩] 여자의 유방

 

 

 

 

라즈니쉬의 강의록을 읽다보면 늘 책에 줄을 치게 된다.

어떤 때는 줄을 치다못해 접고 또 접어서 책이 불쌍해진다.

 

그의 책들은 씹어먹어야 제맛이 나고 ...

나는 오늘도 그가 던진 화두를 씹어 먹는다.

 

인간을 빼고는 그 어떤 것도 자살을 한다거나

삶을 지겨워하지 않는다고 한다.

 

 

동물들도 고통 속에 있을 수는 있다.

그러나 그들은 번민 속에 있다기보다는

단지 하나의 돌연한 사건속에 놓여지고

그들은 그걸 극복해 낸다.

 

그것은 마음의 상처 같은 것이 될 수 없다.

잊혀지고 용서된다.

 

나무는 번민 속에 있지 않다.

그것에는 어떤 고뇌도 없다.

 

오직 인간만이 자살한다.

어떤 동물도 자살하지 않는다고 한다.

 

자살은 절대적으로 인간만의 현상이고 지루함이 극에 달하면

인간은 자신을 죽음에 빠뜨린다.

 

얼마 전 국내 유수의 기업가의 딸의 자살은

그런 점에서 많은 생각거리를 갖게 된다.

 

 

 

얼마전에 영화계의 악동으로 불리우는 38세의 꽃미남(!)인 프랑수아 오종 감독의 영화로
[Water Drops on Burning Rocks-불타는 바위에 떨어지는 물방울]을 보았다.

 

이 영화는 동성애를 다룬듯 하면서도 실상은 죽음의 가치를 다룬 사랑 영화이다.

그의 영화에 자살과 죽음이 자주 등장하는 이유는 '죽음은 인생의 커다란 가치'라는

그의 철학과도 관련이 있어 보인다.

 

중년의 성공한 사업가 레오폴드와 젊은 남자 프란츠가 우연히 만나서 사랑을 나누고...

그들은 손쉽게 동거에 들어간다.

 

중년의 남자는 권력과 부와 카리스마를 바탕으로 젊은 남자 프란츠를 손쉽게 제압한다.

젊은 남자 프란츠는 사귀던 애인 안나 마저도 차버리고 중년의 레오폴드와 동거에 들어가고

이제 그의 삶은 정체성을 잃어버린다.

 

젊은 남자 프란츠가 중년 남자 레오폴드를 위해서 식사를 준비하고 집 안을 청소하면서

그를 기다리는 일상은 어느 남녀의 일상과 별반 다르지 않다.

 

젊은 남자가 하루종일 집 안에 머무르면서 중년의 레오폴드를 사무치게 그리워하다가

눈물을 뚝뚝 떨구는 장면은 차라리 애교에 가깝다.

 

중년의 남자가 사업에 지쳐서 집에 돌아오면 그를 안마해주고 그의 입맛에 맞추어서

요리를 하면서 목욕물을 데우고 집안의 난방을 조절하는 젊은 남자는 이미 남자의 정체성을

전부 잃어버린 '유방 달린 여자'나 마찬가지다.

 

프란츠의 남근은 이제 퇴화되고 단지 작은 젖꼭지가 달린 유방이 그의 역할들을

규정한다.젊은 남자는 이제 스스로의 정체성을 새로 찾아내면서 꿈꾸기 시작한다.

 

'차라리 ...유방 달린 여자로 살 수 있다면...

퇴화되어버린 유방을 키우고 자궁을 만들어서라도 그의 여자로 살아갈 수 있다면......'

 

그러나 중년의 남자는 젊은 남자의 꿈을 배신하듯 프란츠의 애인이었던 안나의 육체를

프란츠와 서로 공평하게 나누어 갖기를 원할 뿐이다.

 

달디 단 젊은 여인,안나의 육체 위에서 환희를 느끼는 중년 남자에게 절망을 느끼면서도

끝까지 사랑을 못버리던 프란츠는 절망 속에서 좌절하다가 희망을 놓아버린다.

 

 

젊은 남자가 제아무리 많은 노력을 기울여도 탐스런 유방 달린 여자가 될 수 없기에 젊은 남자는

여자의 옷을 껴입은채 천천히 극약을 먹고 죽어간다.

 

자신이 갖지 못한 탐스러운 여자의 자궁과 유방을 꿈꾸면서.....

 

 

 

 

라즈니쉬는 여자의 유방을 창조의 순수한 자질로 보았다.

남성의 몸과 여성의 몸은 유사하다.

 

그러나 서로 다른 점도 많이 있으며 이 상이한 점은 늘 상호 보충적이다.

남성에게는 긍정적인 부분이 여성에게는 부정적이다.

 

그리고 여성에게 있어서 긍정적인 부분은 남성에게 부정적이다.

남자와 여자가 깊은 오르가즘 속에서 만날 때 하나의 오르가즘이 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긍정적인 부분과 부정적인 부분이 만나서 하나를 이루고

전류의 흐름을 만드는 것이다.

 

섹스가 그토록 매력적인 이유는 인간이 죄인이기 때문에,

부도덕 하기 때문에 성에 대해서 매력을 느끼는 것이 아니다.

 

이 시대가 너무 음란하기 때문도 아니다.

저질적이고 자극적인 영화나  책 때문이 아니다.

 

섹스에 대한 매력은 남성과 여성이 한 원의 절반만 갖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존재는 완전해지려는 노력을 끊임없이 하고 있다.

 

이 계속되는 완성에 대한 집착이 섹스에 대한 끌림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뭔가 모자람을 느낄 때 우리는 그 모자라는 부분을 채우고 싶어한다.

 

자연은 불완전함을 싫어한다.

남성은 불완전하다.

여성도 불완전하다.

 

이 양자는 순간적으로만 완전할 수 있다.

서로의 극을 만나서 하나의 원이 될 때,

둘이 용해되어 하나가 될 때

그 때만이 완전히 가능하다.

 

여성의 유방은 양극이 된다.

여성의 질은 음극이기 때문이다.

 

남성일 경우 양극은 성기가 되고

그의 음극은 유방이 될 것이다.

 

심리학자들은 하나의 의문을 갖고 있다.

남성에게 유방은 아무 필요도 없는데 왜 남성의 육체에도 유방이 있는가?

 

남성의 경우 자신의 유방은 음극이 된다.

따라서 남성은 여성의 육체 가운데서도 유방에 가장 많은 매력을 느낀다.

여성의 유방은 전류의 양극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이런 경향은 고대 동굴 벽화에서도 제일 강조되고 있는 부분은 유방이다.

육체는 유방을 그리기 위한 배경일 뿐이다.

 

유방이 근본이다.

여성에게 있어서 유방은

그녀의 긍정적인 부분,즉 양극이기 때문이다.

질은 유방보다 민감하지 않다.

 

여성의 육체 가운데서 가장 민감한 부분은 유방이다.

여성의 몸 전체는 유방의 둘레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이유 때문에 힌두교는

여자가 어머니가 되지 않는한

완전한 여자가 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남자는 다르다.

아무도 남자가 아버지가 되지 않는한 완전해지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는다.

아버지가 되는 일은 우연한 일이다.그것은 될 수도 있고 안될 수도 있다.

그것은 기본이 되지 않는다.남자는 아버지가 되지 않아도 전혀 잃는 것이 없다.

 

그러나 여성의 경우는 다르다.

어머니가 되지 않는다면

그녀는 많은 것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여성의 창조력은 ,

여성의 모든 기능은

오직 어머니가 될 때만이 작동되기 때문이다.

 

띠라서 유방이 그녀의 중심이 될 때 그녀는 전체가 된다.

그리고 어린아이가 태어나서 그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한

그 유방은 여자의 중심이 되지 못한다.

 

 

남자는 아내를 얻으려고 결혼을 한다.

그러나 여자는 어머니가 되기 위해 남자와 결혼한다.

 

따라서 여자의 가장 근본적인 관심은

여성 에너지를 일깨우게 하는 아기를 갖는 것이다.

그래서 남성은 두려워한다.

아기가 태어나는 순간 그는

여성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기 때문이다.

 

대신에 아기가 그녀의 중심을 차지해 버린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기에게 질투를 느낀다.

그녀와 그 사이에 아기가 끼어 들었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여성은 남편보다는 아기에게 더 관심을 쏟는다.

남성은,아버지는 존재의 외곽이 된다.

본질이 아니라 생존적 차원에서만 필요하게 된다.

 

아기가 태어남으로써 여성의 근본적 욕구가 충족된 것이다.

 

남자가 여자를 사랑할 때 그는 그녀의 유방을 사랑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유방을 어머니라 부를 수는 없다.

오직 아기에게만 그것이 가능하다.

 

 

혹은 사랑이 너무 깊어져서 남편이 아기처럼 될 수가 있다.

그때는 그것이 가능하다.

그리고 여성은 자신이 애인이라든지

그 남자의 어머니가 되었다는 것을 완전히 잊어버린다.

 

그때는 아기가 더 필요 없다.그녀는 어머니가 될 수 있다.

존재의 중심이 유방 부근에서 일어날 수 있다.

 

여성의 모든 창조성은 이 모성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이 때문에 여성은 어떤 종류의 창작 행위에도 별 관심이 없다.

 

남성은 만들어 내는 자이다.

그러나 여성은 결코 만들어 내는 자가 아니다.

 

여성은 그림을 그리지 않는다.

시를 쓰지 않는다.

저술 활동을 하지 않는다.

그녀는 위대한 종교를 만들지 않는다.

그녀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남성은 '만들어 내는 자'이다.

남성은 창작광이다.그는 발명을 한다.

무기를 만든다.조각을 하고 그림을 그린다.

 

"남성은 천부의 창조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남성은 불완전하다.긴장으로 가득차 있다."

 

-탄트라비전 중에서 -

 

 

 

 

남성은 어머니가 되려고 한다.

창조자가 되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시를 짓는다.

책을 쓴다. 그림을 그린다.

이처럼 그는 많은 부분에서 어머니가 되고자 한다.

 

그러나 여성은 그렇게 하지 않고도 편안하다.

그녀가 어머니가 될 수 있다면 그녀는 이미 충족되었다.

그래서 창작 행위에 별 관심이 없다.

 

여성이 어머니가 될 수 없을 때,

사랑할 수 없을 때,그 때 여성은 뭔가를 하려고 한다.

 

따라서 창조 능력이 마비된 여성만이 창조자가 될 것이다.

시인이 되고 화가가 된다.그러나 그들은 언제나 이류가 될 것이다.

그들은 결코 일류가 될 수 없다.

 

남성이 아이를 낳는다는 것이 불가능하듯이

여성들은 그림을 그리고 시를 짓고

다른 창작 행위를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남자는 어머니가 될 수 없다.

생물학적으로 이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그는 갭을 느낀 것이다.

그 갭을 메우기 위해 그는 많은 것들을 만들어 낸다.

그러나 그 많은 창작 행위에도 불구하고

그의 바람은 충족되지 않는다.

 

여성은 훨씬 쉽게 충족감을 느낄 수 있다.

그녀의 창조성이 유방에 모여 있다.

 

모든 여성들이 그토록 자신의 유방에 대해

신경을 쓰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들의 모든 관심이 이 유방에 집중되어 있다.

그녀는 언제 어디서나 자신의 유방을 의식한다.

그것을 감추든지 노출시키든지 여하튼 유방에 관심이 가 있다.

 

유방이야말로 그녀의 가장 비밀스런 부분이다.

유방이야말로 그녀의 보물 창고다.

창조의 중심이 된다.

어머니의 중심이다.

 

유방에 집중하라.

유방과 하나가 되라.

 

깊고 달콤한 느낌이 그대를 감쌀 것이다.

그것은 그대 주위에서 ,그대 속에서,

그대 위와 아래와 모든 곳에서 고동칠 것이다.

 

유방 속에서 전적으로 휴식하라.

그때 그대의 창조성이 일어날 것이다.

유방이 활동적으로 될 때만이 여성의 창조성은 일어날 것이다.

그 속으로 몰입하라.그리고 창조성이 일어나는 것을 느껴라.

 

그녀의 주위에는 신비한 향기가 돌 것이다.

여성의 향기는 유방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그 향기는 결코 어떤 화학 약품으로도 만들 수 없는 것이다.

 

두 유방에 ,두 유두에 집중하라.

그것들 속으로 녹아 들어라.

 

-탄트라비전 중에서-

 

아....

그래서 우리 여자들이 아이를 갖고 낳고 나면

그 모든게 달라지나 보다.

 

아이를 낳은 여성들이 나른한 행복에만

젖어 있는 걸 보고서 나는 그걸 나태와

게으름으로 생각한 적도 많았다.

 

그러나 이건 순전히 내 착각이었다.

여성은 이미 자신 안에 창조의 열매를 맺을

씨앗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자살을 택한 젊은 남자 프란츠가 그리도 원하고 갈구하던 유방과 함께...

창조의 씨앗은 늘 우리들 여자의 몸 안에서 고동치면서 자리잡고 있다.

 

 

 

 

 

 

 

 

얼마전 동성애 관계로 사귀다가 결혼식을 올린 해외 톱 가수들의 동성애 결혼 기사를 보면서 

이제 문화란 다양성을 기초로 한다는 생각들을 갖게 된다.

 

그러면서도 그들에게 '혹시 여성의 탐스러운 유방이 그립지 않느냐고...'조심스레 묻게 된다.

어찌되었건 그들이 내내 잘 살았으면 좋겠다.

 

-蘭이-


 
출처 : 블로그 > 벌거벗은 만화 | 글쓴이 : 김애란 [원문보기]